그리스도의 수난 묵상 고리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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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수난 시간들』의 매일 묵상의 중요성과  그 가치  

 “내 아버지께서는 내 수난과 함께 청하는 것은 아무것도 거절하지 않으신다.”
      
(다음은 루이사 피카레타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의 시간들』을 최초로 출판한 성 안니발레 디 프란치아 사제가 이 책의 제3판과 제4판에 붙인 머리말입니다)  
                                   

  머리말
 
  1  저자와 충격적인 하나의 광경, 이 책의 특성에 대하여

이 작은 책은 안니발레 마리아 디 프란치아 신부인 저의 이름으로 출판되었으나 저는 저자가 아닙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오로지 사랑하올 우리 구세주 예수님의 형언할 수 없는 고통 및 그분의 지극히 순결하고 거룩하신 어머니 마리아의 고통과 긴밀히 결합하여 살고 있는 어떤 사람에게 제가 이 글을 쓸 것을 꽤나 끈질기게 종용한 끝에 받아 낸 작품입니다.
 
여성인 그 저자가 이 일련의 묵상을 시작한 것은 어느 날의 체험 이후부터였습니다. 당시 열세 살의 소녀였던 저자는 자신의 조그만 방에서 폭동이라도 일어난 듯한 사납고 시끄러운 소리를 들었습니다. 길에서 난폭한 군중이 난동을 부리며 내려오고 있는 것 같았던 것입니다. 그 소음을 듣고 그녀는 발코니로 달려 나갔고, 거기에서 뜻밖의 한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군복을 입은 한 무리의 사나운 병사들이 창검으로 무장한 채 술기운과 분노가 겹친 험악한 몸짓으로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대며 한 사람을 끌고 가는 중이었는데, 들고 있던 창으로 그 사람을 쿡쿡 찔러대기도 하는 것이었습니다. 허리를 구부리고  비틀비틀 끌려가는 그 사람에게서는 핏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오, 얼마나 끔찍한 광경이었는지!
워낙 관상적인 영혼의 소유자인 소녀는 두려움과 충격으로 몸을 떨었습니다. 그녀는 저토록 심하게 얻어 맞고 악랄하기 짝이 없는  학대를 받으며 끌려가는 사람이 대체 누구인지 알아내려고 마음을 졸이며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무서운 행렬이 그녀의 발코니 아래에 다가왔을 무렵, 바로 그 사람이 고통에 지친 머리를 들고 애처로운 표정으로 소녀를 올려다보면서 호소하는 듯한 낮고 굵은 음성으로 “영혼아, 나를 도와다오!” 하고 외쳤던 것입니다.
 
 오, 세상에!
그 순간 이 영혼은 그분을 보았습니다.......
그분을 감지했습니다.......
그분을 알아보았습니다.......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가시관을 쓰시고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거룩하신 구원자이셨습니다.
 
그분을 그들이 그리도 난폭하게 갈바리아로 끌고 가는 중이었습니다. 이 고통스러운 ‘십자가의 길’ 광경이 그녀의 영안과 육안 앞에 재현되고 있었습니다.  이천 년 전의 그 사건이 하느님의 전능으로 고스란히 현실화되었고, 예수님께서 그녀를 보시며 “영혼아, 나를 도와다오!” 하고 외치셨던 것입니다.
 
열세 살 된 소녀는 그 순간 거의 실신할 정도로 괴로웠습니다. 그 참혹한 광경을 차마 더 이상 볼 수 없어져 물러섰고,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한 채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구원을 위해 그 지경이 되신 지고한 선이신 분에 대한 사랑과 연민의 정이 울컥 북받치는 바람에 발코니로 도로 달려 나와서 떨리는 눈길로 다시 그 길 근처를 둘러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때에는 모든 것이 사라졌습니다! 군중도 그 어지럽던 소동도 예수님도 이미 보이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이, 성체 외의 모든 것이 사라졌습니다. 여기에서 제가 성체라고 하는 것은, 우리에 대한 사랑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려고 고난을 받으시며 끌려가신 예수님의 그 분명한 모습을 뜻합니다. 그녀에게 또 한 가지 남은 것은, “영혼아, 나를 도와다오!” 하신 그분의 음성이었습니다. 이 음성이 그녀의 내면에서 아직 강하게 메아리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홀로 숨은 듯이 살고 있는 이 영혼의 영적 젊음이 한창 꽃을 피우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습니다.  고난 받으시는 예수님에 대한 사랑에 사로잡힌 나머지 밤낮으로 그분 생각을 그칠 수가 없었으니, 다정하신 우리 구세주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더없이 깊은 사랑으로 관상하면서 고통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이 환시를 보고 그 애처로운 호소 - “영혼아, 나를 도와다오!” - 를 들은 지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도 이 책의 저자는 그때 시작한 예수님의 수난 묵상을 그친 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저자의 이름이나 그녀가 고독하게 살고 있는 고을의 이름을 밝히는 것은 적절하지 못한 일일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 머리말에서, 또 이 작은 책에 포함된 묵상들 전체에 걸쳐서 저자를 단지 ‘영혼’이라고 칭하거나 그 이름을 대신할 수 있는 형용사, 술어, 별칭들을 사용하려고 합니다.  
 하느님의 섭리는 모든 시대에 몇몇 영혼들을 불러일으키시어 그분을 알고 사랑하며 다른 사람들에게도 알리고 사랑하게 하시거니와, 이제 거룩하신 구세주의 고난에 자기 자신을 봉헌한 한 영혼을 불러일으키셨으니, 이 영혼이 받은 특별한 영감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묵상하는 새롭고 매우 유익한 방식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이 방식은 우리로 하여금 성목요일 오후 다섯 시부터 성금요일 오후 다서 시까지 24시간을 한 시간씩 차례로 기억하게 하므로, 예수님께서 이 24시간 동안 잇달아 겪으신 것을 시간마다 묵상하도록 도와줍니다.
 
제가 이 방식에 “새롭고”라는 수식어를 붙인 것은, 예수님의 수난을 24시간으로 한정한 점 때문이 아니라, 그 독특한 형식과 감정과 목적이 우리에게 전적으로 새로운 접근법을 열어주기 때문입니다.
 
이 “새로운” 방식은 전체적이고 완전한 ‘십자가의 길’(Via Crucis)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께서 빌라도의 법정에서 사형 선고를 받으신 순간부터 그분을 따라가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전승이 일반적으로 밝히는 바와 같이) 그분의 고통스러운 수난이 실제로 시작되는 시점, 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지극히 거룩하신 어머니와 작별하시는 순간부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이 시점이 ‘최후 만찬’, ‘겟세마니’, 잡히심과 결국 죽음에 이르는 그분의 수난 여정의 시작을 명시하는 것입니다.  
 
이 영혼이 저술하여 저에게 맡긴 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의 시간들』의 첫째가는 새로운 점은 수난의 각 시간에 대한 생생한 묘사입니다. 시간마다 그 특유의 묵상과 기도와 보속을 풍성히 담고 있는데, 이는 이전의 저자들이 사용한 문체와 사뭇 다른 점입니다. 그들은 짧은 문장으로, 이를테면, “오전 여섯 시에서 일곱 시 사이에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심문을 받으시다.”, 또는 “오전 일곱 시에서 여덟 시 사이에 예수님께서 헤로데 앞에 서시다.” 하는 식으로 표현했으니 말입니다.

둘째가는 새로운 점은, 
주님께 열중한 이 고독한 영혼은 ‘애정’과 ‘보속’에 본질적인 특성을 끌어넣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표현된 감정의 강도가 하느님과의 절친한 관계를 상기시키는 것을 보면, 이 저술의 영감이 인간적인 것이라기보다 신적인 기원에 있는 듯 한 것입니다.  
 
이 거룩한 묵상들 속에서는 모든 것이 새롭게 보입니다. 묵상 주제들은 교회 안의 다른 저자들과 같은 신비들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그럼에도 확실히 신적 영감이 - 그 다양한 은총(multiformis gratia Dei)의 능력을 통해 새로운 여러 가지 통찰을 쏟아내면서 - 이 고독한 영혼의 작품 안에 더욱 특별한 모양으로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언급해 둘 것은, 이 경건한 저자는 학식을 갖춘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가까스로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수준의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흠숭하올 우리 구세주께서 받으신 고난과 학대와 모욕과 고문을 아주 생생한 필치로 묘사하고 있어서 그 말이 독자들의 마음과 정신을 꿰뚫으며 깊은 감동을 자아내어 그들을 사랑에로, 사랑이신 분께로 끌어당기는 것입니다.
 
사랑, 그렇습니다, 더없이 부드럽게 표현된 거룩한 사랑이야말로  (우리는 이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이『수난의 시간들』의 주된 특성입니다.
 
즉, 인간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 숨은 영혼의 사랑입니다. (예수님과의) 사랑에 빠진 그녀의 영혼이 사랑하올 그분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사무치도록 애틋한 어조로 표현합니다. 연민과 위무(慰撫)와 포옹과 입맞춤으로 고난 받으시는 예수님을 늘 동반하고, 더군다나 자기 자신을 흠 없는 대리 산 제물로 끊임없이 바칩니다. 할 수 있는 한 경건하게, 비탄에 잠기신 그 사랑하올 분을 대신하면서 그분의 고통을 떠안는 것입니다. 마치 지고한 선이신 그분께 때로는 그 잔혹한 고통을 면해 드리려는 듯이 말입니다.
 
이 관상적인 영혼에게는 과거나 현재나 미래가 없습니다.
모든 것이 영원한 현재입니다. 그러니 수난의 장면들도 흡사 눈앞에서 전개되는 실황처럼 재현하여 강한 인상을 줍니다. 사랑하는 분에 대한 넘치는 동정심과 애정으로 그분의 눈과 얼굴과 입과 손발과 성심에 입 맞추면서, 사랑에 빠진 극소수의 영혼들을 제외하고는 일찍이 알려진 적이 없는 신뢰심으로 그분께 자신의 입맞춤에 답해 달라고 청하기도 합니다.  그녀는 이렇게 외치는 아가(Canticle of Canticles)의 신부입니다. “아, 제발 그이가 내게 입 맞춰 주었으면!”1)    
 
우리는 우리 주님의 지극히 거룩하신 성심이 경외심뿐만 아니라 효성과 애정이 깃든 믿음도 사랑하신다는 것을 의심할 수 없습니다. 지극히 보배로우신 피 한 반 방울만으로도 넉넉히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이 그토록 뼈에 사무치는 고통과 격통을 자원해서 받으시며 우리에 대한 사랑을 드러내 보이셨으니, 우리가 어찌 그분을 믿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에게 당신 전부를 주셨고 또 주고 계시는 예수님께 입맞춤을 해 달라고 청하는 것이 과연 너무 많은 것을 청하는 것이 되겠습니까? 
사실 방탕한 아들의 아버지는 아들이 오는 것을 보자 가엾은 마음이 들어 달려가 그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지 않았습니까?2) 또 착한 목자가 어깨에 메고 온 어린양은 목자에게서 입맞춤과 쓰다듬을 받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예수님에 대한 사랑에 빠진 또 하나의 천사 같은 영혼인 성녀 아녜스는 실제로, “그분을 사랑하며 몸으로 접촉할수록 나는 더욱더 정결하고 순수해진다.”고 말하곤 하지 않았습니까?  
 
이러한 신뢰는 참으로 사랑스러운 것입니다. 신뢰는 겸손한 사람으로 하여금 하느님의 마음을 살짝 훔치게 합니다! 이것이, 우리 주님께서 어린이 하나를 무릎 위에 앉히시고 귀여워하시면서 “하늘 나라는 이런 어린이들에게 속해 있다.”3)고 하셨을 때에 주신 가르침이요, 우리가 어린이가 되는 참다운 길입니다.    
 
이 신뢰가  『수난의 시간들』의 페이지마다에서 발산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거룩한 묵상을 실천하기 위한 안내자로 이 책을 사용하는 영혼들은 모두, 이 책에 영감을 준 것과 같은 감정과 연민과 사랑과 신뢰를 조금씩 함께하고 있음을 서서히 깨닫게 될 것입니다.    
 
때때로 이 숨어 지내는 영혼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자신의 책 안에 끼워 넣습니다. 그럴 때에는 그녀 나름의 감정을 담지 않고 하느님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하지만 그녀 자신의 사회적 문화적 배경을 반영하는 어구(語句)가 풍부한 말로 표현합니다. 실제로 모든 신적 영감이나 계시는 인간이라는 통로를 거치기 때문에 바로 그 통로의 능력 또는 신비적인 직관력에 따라 표현되기 마련입니다. 이 사실이, 관상적인 영혼들이 서로 다른 것처럼 이들이 동일한 주제에 대해 말할 때에도 그 표현이 각기 다를 수 있음을 설명해 줍니다.  
 
그런데  『수난의 시간들』의 저자는 ‘애정’ 속에 새로운 점들을 도입하는 데에 성공한 사람입니다. 이것이 사실임과 마찬가지로, 제가 보건대, ‘보속’에도 독특함과 최대한도의 당위성을 도입했음이 사실입니다. 하기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모든 모욕에 대한 보속은 항상, 그분과의 사랑에 빠진 많은 영혼들의, 많은 신심 서적의, 때로는 특별한 계시의 주된 목적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성녀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는 예수님의 지극히 거룩하신 성심에 바친 그녀의 기도서에 특별한 ‘보속’을 포함시켰습니다. 그리고 가르멜회 수녀인 가경자 성 베드로의 마리아가 받은 계시에 포함된 ‘예수님의 지극히 거룩하신 이름과 얼굴’에 대한 신심은 한층 더 뚜렷이 이 목적을 향하고 있습니다.
 
보속은 보통 흠숭과 개심과 기도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수난의 시간들』의 보속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를 속량하기 위해 견디어 내신 고난 과정의 매 걸음마다 개인적인 동화와 일치로 그 속에 들어가는 행위를 포함합니다. 이는지극히 거룩하신 성심께서 느끼시는 감정과 그분의 신성한 고통에 참여하며 그것을 공유하는 것이니, 영혼이 예수님과 함께 고통 받고 탄식하며 기도하고 보속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보속의 목적은 무엇이겠습니까?
이 경건한 실행을 통한 보속은 무한히 확장되며 증가하여 우리 주님의 고난의 원인이 된 모든 죄에 적용됩니다. 첫마디에서 마지막 말에 이르기까지 - 우리는 이것을 확실히 말할 수 있습니다. - 이 작품은 대죄와 소죄를 막론하고 온갖 종류의 모든 죄들에 대한 끊임없고 다양한 보속을 제공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기 지상에서 원수들의 수중에 계셨을 때 흠숭하올 그분께 저질러진 죄들뿐만 아니라, 그 전 사람들과 뽑힌 사람들에 의해 저질러지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들에도 적용됩니다.

감히 말해 본다면,
이 공동 구속자적인 영혼은 우리 주님의 각 고통 속에 뛰어들어 잠긴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녀는 우선 무한히 깊은 신적 심연을, 인간에게 허락되는 한도만큼 곰곰이 헤아려 봅니다. 그런 다음 고난 받으시는 하느님이시며 사람이신 분의 구원 의지에 자신의 지향을 일치시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의 죄를 한꺼번에 포장한 꾸러미를 예수님과 아버지와 하느님의 정의에 바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만인에게 (그 효력이) 두루 미치는 이 중대하고 긴요한 보속 이야기를 하는 것은, 죄악이 불어난 현 세대에 이러한 보속이 절실히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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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수난의 시간들』의 가치와 유익한 효과 및 이 묵상 실천이 주님께 드리는 기쁨에 대하여
 
다음은 우리 주님께서 이 책을 쓰게 된 저자에게 주신 계시들 중 일부입니다.
이는 이 경건한 실행이 흠숭하올 예수님의 성심에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보여 주는 것들입니다. 단, 교황 우르바노 3세의 교령에 따라 성교회의 결정에 무조건 순종하고 인간적인 믿음 외에는 달리 구하는 바가 없음을 천명하면서 신중을 기하여 이 계시들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먼저 저자가 필자에게 보낸 편지부터 소개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존경하는 신부님, (제 손으로 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의 시간들』을 마침내 신부님께 보내 드리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주님의 더 큰 영광이 되기를 빕니다.  저는 또한 이 『수난의 시간들』에 대한 묵상에서 얻게 될 선익과 공로 및 예수님의 약속에 대해서 쓴 글4)도 함께 동봉합니다.
이를 묵상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많은 은혜를 받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죄인이라면 하느님께 돌아올 것이고, 불완전한 사람이라면 완전해질 것이고, 거룩한 사람이라면 더욱 거룩해질 것이고, 유혹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이라면 승리를 거둘 것이고, 병든 사람이라면 힘과 약과 위로를 얻을 것이고, 영혼이 약한 사람이라면 영적 양식뿐만 아니라 아름다움과 완전함을 반사하는 거울도 얻어, 예수님께서 주신 이 모범에 비추어 자신의 삶을 만들어 갈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 『시간들』에 대해 묵상할 때에 예수님께서 얼마나 크나큰 기쁨을 느끼시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이 책이 도시나 마을마다 적어도 한 권은 있어서 (그것이 활용되는 것을) 보고 싶어 하십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께서 그 고통스러운 수난의 24시간 동안 아버지께 보속으로 바치신 당신 자신의 기도와 말씀을 듣고 계신 듯할 것입니다. 또한 - 예수님의 말씀이 뜻하는 바에 의하면 -  각 마을이나 도시마다 이 묵상 기도를 바치는 사람이 한 사람만 있어도, 고문과 학살이 자행되는 이 비통한 시대에, 부분적으로나마 하느님의 의노가 진정되고 징벌도 완화될 것입니다.

존경하는 신부님, 모든 사람에게 이 소식을 널리 알려 주십시오. 그러면 사랑하올 예수님께서 제게 맡기신 이 일을 완성하도록 신부님께서 저를 도와주시게 될 것입니다.  덧붙이고 싶은 말씀은 이 『수난의 시간들』의 목적은 주님의 수난 사건을 다시 상세히 이야기하는 데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 거룩한 주제를 다룬 책들은 이미 많이 있고, 따라서 또 하나의 책을 낼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 보다도 이 책의 목적은 보속에 있습니다.
이 보속은 우리가 예수님 수난의 각기 다른 단계들을 각기 다른 종류의 죄들과 나란히 놓음으로써 이루어집니다. (이는 각별히 주목할 점입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가 예수님과 하나 되어 하느님께 합당한 보속을 바치면서 피조물이 하느님의 정의에 빚져 있는 것을 거의 다 갚게 됩니다.
 
이런 이유로 이 『시간들』 속에 여러 가지 보속의 방식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주님께 감사를 드리는 대목이 있는가 하면, 다른 대목에서는 동정심을 표현하고, 또 다른 대목에서는 찬미를 드리고, 또 다른 대목에서는 고난을 받으시는 예수님을 위로합니다. 그런가 하면, 보상을 바치고, 애원하고, 기도하고, 간청하는 대목들도 있습니다.
 
존경하는 신부님, 그러므로 신부님께서 이 완결된 작품을 출판하시되 거기에 서문을 붙여 일반 사람들에게 내놓으시기 바랍니다.”
 저자가 위의 편지에서 동봉한다고 한 글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는 『수난의 시간들』을 묵상하는 사람들이 받게 될 은혜, 효과 및 예수님의 약속 등에 대한 것입니다.   저자의 일기5)에서 발췌한 내용자의 자전적(自傳的)  
1906년 11월 9일  
여느 때와 다름없이 있으면서 우리 주님의 수난에 대하여 묵상하고 있노라니 그분께서 오셔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 딸아, 내 수난에 대하여 끊임없이 묵상하며 가슴 아파하고 나를 측은히 여기는 사람은 내 마음을 무척 기쁘게 하기에 내가 수난의 전 과정을 통해 겪었던 모든 것에 대해서 위로를 받는 느낌이 된다. 그리고 언제나 그것을 묵상함으로 인해 영혼은 늘 음식을 마련할 수 있게 되는데, 이 음식에는 여러 가지 양념과 맛이 있어서 다양한 효과를 낸다. 이를테면, 내 수난 중에 저들은 밧줄과 사슬로 나를 묶었지만 이 영혼은 나를 풀어 자유롭게 해 주고, 저들은 나를 업신여기며 침을 뱉고 모욕했지만 이 영혼은 내게 감사하며 침을 깨끗이 씻어 주고 나를 공경한다.


또한, 저들은 내게 가시관을 씌우며 왕이라고 놀리고 내 입에 쓸개즙을 갖다 대며 나를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이 영혼은 나의 모든 고통을 묵상하면서
내게 영광과 영예의 관을 씌워 자기의 왕으로 공경하고, 내 입 안 가득 단맛이 퍼지도록 더없이 맛있는 음식을 먹여 준다. 이 음식은 바로 나 자신의 업적에 대한 기억이거니와, 그러고 나서 이 영혼은 내게 박힌 못을 뽑고 십자가에서 나를 빼내어 자기의 마음 안에서 부활하게 한다. 그리고 그 영혼이 그렇게 할 때마다 나는 그에게 은총의 새 생명을 상급으로 준다. 그런 영혼이 나의 음식이고 나 역시 그의 지속적인 음식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나를 가장 기쁘게 하는 것은 끊임없이 내 수난에 대하여 묵상하는 일이다.”
 
1913년 4월 10일
오늘 아침에는 언제나 사랑하올 내 예수님께서 오시어 나를 품에 꼭 껴안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딸아, 내 수난에 대해서 항상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 마음 안에 샘을 형성하고 있어서, 이 생각을 하면 할수록 그 샘도 더욱 확장된다. 그리고 샘솟는 물이 사람들에게 공동으로 쓰이는 것과 같이, 이 마음의 샘도 그 사람 자신의 선익과 나의 영광과 다른 사람들의 선익을 위해 쓰인다.” 그래서 나는 그분께 “저의 선이시여, 말씀해 주십시오. 당신께서 저에게 가르쳐 주신 것과 같이 이 『수난의 시간들』을 묵상하며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상급을 주시렵니까?” 하고 여쭈었다.    그분은 이렇게 대답해 주셨다.

“딸아, 네가 이『시간들』을 묵상하며 기도할 때, 나는 이를 너의 것으로 여기지 않고 내가 행하는 것으로 여긴다. 그러므로 마치 내가 수난 고통을 받고 있는 것처럼 나의 공로와 같은 공로를 준다. 이와 같이 이 기도를 바치는 이들에게도 그 지향에 따라 같은 효과를 거두게 하겠다.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그렇게 해 주리니, 내가 이보다 더 큰 상급을 줄 수 없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천국에서도 그들이 내 『수난의 시간들』을 기도한 횟수만큼 사랑과 기쁨의 불화살을 쏘면서 내 앞에 자리하게 하겠고 그들 역시 내게 그렇게 할 것이다. 모든 복된 이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참으로 달콤한 황홀이 될 것이다!”
 

오, 도시마다 단 한 사람이라도 
이 『수난의 시간들』 기도를 바친다면 내 마음에 참으로 큰 기쁨이 일 것이다!  

1913년 9월 6일
이제 글로 쓰인 ‘수난의 기도’를 보면서 어째서 여기에는 대사(大赦)가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사가 풍성히 붙어 있는 기도들이 많이 있는데, 이 기도에는 그것이 없으니 이를 바치는 이들은 얻는 것이 없지 않겠는가? 하며 의아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언제나 사랑하올 예수님께서 매우 다정한 음성으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 딸아, 대사가 붙어 있는 기도를 바침으로서 사람들은 하나의 대사를 얻는다.

그 반면에, 내  『수난의 시간들』은 바로 나 자신의 기도요 보속이며 온통 사랑이기 때문에 내 성심 깊은 데서 솟아난다. 내가 너와 하나 되어 이 기도를 바치면서 얼마나 여러 번 세상에 내릴 징벌을 은총으로 바꾸곤 했는지, 너 혹시 잊어버린 것 아니냐? 그토록 내 마음을 흐뭇하게 해 주는 기도인 만큼, 나는 이 기도를 바치는 사람에게 하나의 대사가 아니라, 헤아릴 수 없도록 무한한 가치의 부를 지닌 한 움큼의 사랑을 준다.그 외에도, 순수한 사랑으로 이것이 실행되면 내 사랑이 자신의 분출구를 찾아 얻게 된다. 그런즉 피조물이 창조주의 사랑에 위로와 분출구를 제공한다는 것이 어찌 대수롭지 않은 일이겠느냐?”
 
1914년 10월
 『수난의 시간들』을 쓰면서 혼자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이 복된 『수난의 시간들』을 종이에 옮겨 적는다는 것이 내게는 기막힌 희생이다. 특히, 오직 예수님과 나 사이에서만 일어난 어떤 내적 행위들은 글로 쓰기가 여간 어렵지 않으니! 이 희생에 대해서 그분께서는 내게 어떤 상급을 주실까?’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감미롭고 다정한 음성을 들려주시면서 “딸아, 내 『수난의 시간들』을 쓴 상급으로, 네가 쓴 낱말 하나하나에 대해서 한 번의 입맞춤을, 한 영혼을 네게 주마.” 하고 말씀하셨다. 나는 그래서, “제 사랑이시여, 그건 제게 주실 상급이겠지요? 하지만 이 기도를 바치는 다른 이들에게는 무엇을 주시렵니까?” 하고 여쭈었다. 

예수님의 대답은 이러하였다. “이『수난의 시간들』의 효과는 사람들이 나와 어느 정도로 긴밀히 일치하여 바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그러므로 그들이 나와 함께, 나 자신의 뜻으로 이 기도를 바친다면, 그들에게도 역시 발음하는 낱말 하나하나에 대해서 한 영혼을 주겠다. 또한, 나의 뜻과 하나 되어 이 기도를 바침으로써 그들은 나의 의지 안에 숨어들게 된다. 따라서 활동은 나의 의지가 하게 되므로 단 하나의 낱말로도 내가 원하는 모든 선을 낳을 수 있다. 그것도 네가 이 기도를 바칠 때마다 그렇게 할 작정이다.”
 
또 한 번은 이 『수난의 시간들』을 쓰기 위하여 그토록 많은 희생을 치른 뒤에도 정작 이를 실행하는 사람은 너무나 적기 때문에 내가 예수님께 한탄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딸아, 애통해하지 마라. 이를 실천하는 사람이 딱 한 사람밖에 없다고 하더라도 너는 기뻐해야 한다. 나는 다만 한 영혼만이 구원될 수 있었다고 해도 내 수난의 전 과정을 겪지 않았겠느냐? 너도 마찬가지다. 이용하는 사람이 얼마 되지 않는다고 해서 네가 이 선행에 게을러선 안된다. 손해를 입게 될 쪽은 다만 이를 활용하지 않는 사람들뿐이다. 그리고 나의 수난은 내 인성으로 하여금 모든 사람이 구원될 공로를 얻게 하였다. 

모든 사람이 다 구원되는 것은 아닌데도 그러한 공로를 얻은 것은, 나의 뜻이 모든 이를 구원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것은 내가 원한 것에 따라 얻은 공로이지 사람들이 거기에서 끌어낼 이득에 따라 얻은 것이 아니다. 너도 이와 꼭 마찬가지다. 너의 뜻이 어느 정도로 나의 뜻과 하나 되어 모든 이에게 선을 베풀고자 했는가에 따라 상급을 받게 될 터이니 말이다. 손해를 입게 될 쪽은 이를 실행할 수 있으면서도 하지 않는 사람들뿐이다. 
 
이 『시간들』은 모든 기도 중에서 가장 고귀한 기도이다.
내가 지상생활 동안 행했던 일과 지극히 거룩한 성사 안에서 지금도 계속하고 있는 일을 되풀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수난의 시간들』 기도를 하는 소리가 들리면, 나는 거기서 나 자신의 음성과 기도를 듣게 된다. 기도를 바치는 사람의 영혼 안에서 모든 이의 선익을 갈망하며 모든 이를 위하여 보속하고 있는 나의 뜻을 보게 되고, 그리하여 그 영혼이 행하고 있는 바를 나도 그 안에서 할 수 있기 위하여 그에게로 거처를 옮기는 나 자신을 느낀다.

오, 도시마다 단 한 사람이라도 이 『수난의 시간들』 기도를 바친다면 내 마음에 참으로 큰 기쁨이 일 것이다!  도시마다 나 자신이 있는 듯한 느낌이 들 테니 말이다! 그러면 이 시대에 몹시 분노하고 있는 나의 정의가 부분적으로나마 그 노여움을 풀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한 가지 덧붙여 보면, 어느 날 나는 천상 엄마께서 예수님을 무덤에 안장하시는 시간 (곧 ‘제24시간’) 기도를 바치면서 극심한 비탄에 잠기신 어머니를 동정하며 끝까지 곁에 남아 있었다. 그러나 이 ‘시간’을 묵상할 때마다 늘 그렇게 하지는 않았고 간혹 그렇게 했을 뿐이다. 그런데, 앞으로도 늘 그렇게 해야 할지 어떨지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있노라니, 복되신 예수님께서 온통 사랑에 젖은, 또 내게 간절히 청하시는 듯한 음성으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딸아, 나는 네가 그것을 빠뜨리지 않기 바란다. 내 엄마를 기억하면서 나에 대한 사랑으로 언제나 그렇게 하여라. 네가 그렇게 할 때마다 내 엄마는 몸소 세상에 계시면서 당신 삶을 다시 살고 계시는 것처럼 느끼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어머니께서 지상 생활 동안 내게 주신 영광과 사랑을 받으시게 된다. 그리고 나는 내 엄마가 다시 세상에 계시면서 어머니다우신 자상함과 사랑과 모든 영광을 내게 주시는 것처럼 느낀다. 따라서 나는 너를 어머니로 여기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나를 껴안으시면서 아주 부드럽게 “내 엄마, 엄마.” 하셨고, 또한 자애로우신 엄마께서 이 ‘시간’에 행하시고 겪으셨던 모든 것을 내게 속삭여 주셨다. 그래서 나는 엄마를 따라 함께 하였다. 그때부터 예수님 은총의 도움으로 한 번도 빠뜨리지 않고 그렇게 하였다.
 

"사람들이 땅에서 내 『수난의 시간들』을 바칠 때마다 
내가 하늘에 있는 너를 늘 새로운 빛과 영광으로 옷 입혀 줄 작정이다.”

1914년 11월 4일
 『수난의 시간들』 기도를 바치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매우 기뻐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딸아, 네가 내 『수난의 시간들』을 반복하는 것을 보면서 느끼는 내 기쁨이 얼마나 큰지 네가 알면 참 좋겠다. 게다가 너도 늘 이 기도를 반복하다보면 기쁨을 느끼게 될 것이다. 사실, 내 성인들은 내 수난을 묵상하면서 내가 얼마나 극심한 고난을 받았는지를 깨달았고, 너무나 측은해서 울음을 터뜨리기도 하였으며, 내 고통에 대한 사랑으로 온 몸이 불타는 듯한 체험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이 기도처럼 순서에 따라 지속적으로 반복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너야말로 내 생애와 내가 겪은 것의 편린(片鱗)들을 시시각각 너 자신 안에 보존함으로써 이리도 크고 특별한 기쁨을 내게 주는 첫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 너에게 나는 매우 강하게 끌림을 느끼기에 시시각각 그것을 음식으로 주고, 같은 음식을 너와 함께 먹으며, 네가 하는 일을 함께 한다. 하지만 내가 너에게 새로운 빛과 새로운 은총으로 풍부하게 보답해 주리라는 점도 알아 두어라. 네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사람들이 땅에서 내 『수난의 시간들』을 바칠 때마다 내가 하늘에 있는 너를 늘 새로운 빛과 영광으로 옷 입혀 줄 작정이다.”
 
1916년 4월 23일
여느 때와 다름없이 있노라니 흠숭하올 예수님께서 온통 빛에 휩싸여 나타나셨다. 이 빛은 그분의 지극히 거룩하신 인성 안에서 나오는 것으로서 매혹적이고 황홀한 모습이 되도록 그분을 아름답게 꾸미고 있었다. 놀라움에 잠긴 나에게 그분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딸아, 내가 겪은 아픔마다, 흘린 피 방울방울마다, 각각의 상처마다, 기도와 말과 행위와 발걸음 등등마다 내 인성 안에 빛을 낳았으니, 이 빛이 천상의 모든 복된 이들을 황홀하게 할 정도로 나를 아름답게 꾸몄다. 이제는 영혼이 내 수난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따뜻한 동정심을 표현하며보속과 또 다른 행위들을 할 때마다, 내 인성으로부터 빛을 끌어내어 나와 비슷한 모습으로 미화된다. 그러므로 내 수난에 대한 생각을 하나 더할 때마다 그것이 그에게 영원한 기쁨을 가져올 또 하나의 빛이 된다.”  
 
1917년 2월 2일
여느 때와 다름없이 있다가 나 자신의 바깥에 나가 있음을 알았는데, 언제나 사랑하올 예수님께서 피를 뚝뚝 흘리시며 끔찍한 가시관을 쓰고 계셨다.
눈을 찌르는 가시들 사이로 간신히 나를 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딸아, 이 세상이 마음의 평형을 잃게 된 것은 내 수난에 대한 기억을 잃었기 때문이다. 어둠 속에서, 세상은 자기를 비추어 줄 내 수난의 빛을 찾아내지 못하였다. 이 빛을 찾아내었더라면 나의 사랑을 알려 주고 영혼들을 구하는 것이 내게 얼마나 큰 희생을 치르게 했는지를 알려 주었을 것이니, 세상이 자기를 참으로 사랑한 분에 대한 사랑으로 돌아왔을 것이다. 그리고 내 수난의 빛이 세상을 인도하면서 모든 위험에서 지켜 주었을 것이다. 나약함 속에서, 세상은 자기를 떠받쳐 주었을 내 수난의 힘을 찾아내지 못하였다.

참을성 없음 속에서, 세상은 자기에게 평온과 고요한 자기 포기의 정신을 불어넣었을 내 참을성의 모범을 찾아내지 못하였다. 찾아내었더라면 내 참을성 앞에서 부끄러움을 느끼며 자기 지배를 마땅한 의무로 여겼을 것이다.고통 속에서, 세상은 고통을 지탱해 주며 고통에 대한 사랑을 불어넣어 주었을 하느님 고통의 위로를 찾아내지 못하였다. 죄 속에서, 세상은 그것과 마주 서서 그 안에 죄에 대한 증오를 불어넣었을 나의 거룩함을 찾아내지 못하였다.

아! 인간은 이렇듯 모든 것을 악용했다. 모든 것 속에서 자기를 도울 수 있는 분을 제거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세상이 평형을 잃은 것이다. 그것은 마치 더 이상 제 어머니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아이와 같이, 또는 스승을 부인하며 더 이상 그의 가르침을 듣거나 교훈을 배워 익히려고 하지 않는 제자와 같이 굴었다. 그런 아이와 제자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겠느냐?그들은 그들 자신의 고통이 될 것이고, 사회의 공포와 고통이 되기도 할 것이다. 인간이 공포와 고통이, 그것도 동정의 여지조차 없는 고통이 되고 만 것이다. 아, 갈수록 더욱 악화되고 있는 인간 ! 이 인간을 내가 피눈물을 흘리며 통탄해하고 있다!”
 
1917년 5월 12일
평소와 같이 있으면서 다정하신 예수님 안에 온 존재로 녹아들었다. 그런 다음 모든 피조물 속에 나 자신 전부를 쏟아 부었다. 모든 피조물에게 예수님 전체를 주기 위함이었다. 그러자 사랑하올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딸아, 한 피조물이 내 안에 녹아들 때마다 모든 피조물에게 하느님 생명의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네 필요에 따라 그 효과를 얻는다. 약한 이들은 힘이 돌아오는 것을 느끼고, 죄에 들러붙어 있는 이들은 빛을 받고, 고통 중에 있는 이들은 위로를 얻고, 다른 모든 경우에도 같은 식으로 효과를 얻는다.” 
     
그 뒤 나는 나 자신의 바깥에 나가 있었다. 연옥 영혼들과 성인들로 보이는 많은 영혼들 가운데 있었는데 그들은 내게 말을 걸면서 얼마 전에 죽은, 내가 아는 한 사람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그는 이 『수난의 시간들』의 날인을 지니지 않고 연옥에 들어오는 영혼이 하나도 없음을 보면서 기쁨을 느끼고 있습니다. 영혼들이 이 『시간들』의 호위와 도움을 받으며 안전한 곳에 자리를 잡고 있으니까요. 또한 이 『수난의 시간들』의 동반을 받지 않고 천국으로 날아드는 영혼도 없습니다. 이와 같이 이 『시간들』은 천국에서 땅으로, 또 연옥과 하늘에까지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이슬이랍니다.”

이 말을 듣고 나는, ‘아마도 내 사랑하올 예수님께서 『수난의 시간들』 중 각 낱말마다 한 영혼을 주시겠다고 하셨던 약속을 지키시려고, 이 『시간들』에서 이익을 얻지 않고 구원되는 영혼은 하나도 없도록 하시나 보다.’ 하고 혼잣말을 했다. 나중에 나 자신 안으로 돌아오자 다정하신 예수님이 계시기에 그것이 사실이냐고 여쭈어 보았더니 이렇게 대답해 주셨다.
 
“이『시간들』은 우주의 질서이다. 그러기에 하늘과 땅을 조화롭게 하고, 나로 하여금 세상을 멸하지 못하게 한다. 나의 피와 상처와 사랑이, 내가 행한 모든 것이, 모든 이를 구원하기 위하여 두루 흘러가고 있음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수난의 시간들』 기도를 할 때에 나는 영혼들을 구원하고자 하는 나의 피와 상처와 열망이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것을 느낀다. 곧 내 생명이 거듭 재현되고 있음을 느끼는 것이다.

그러니 이 『시간들』에 의해서가 아니라면 사람이 어찌 모든 선을 얻어 낼 수 있겠느냐? 네가 의아해하는 까닭이 무엇이냐? 이 일은 너의 것이 아니라 나의 것이다. 너는 유한하고 나약한 도구 노릇을 해 왔을 뿐이다.”
             
1914년 11월 6일
늘 하듯이 『수난의 시간들』을 계속하고 있노라니 사랑하올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딸아, 세상은 내 수난을 초래한 행위들을 끊임없이 새로이 하고 있다. 나의 무한성은 인간 안팎의 모든 것을 휩싸고 있기에 이들과의 접촉으로 말미암아 내가 수난 중에 겪은 것들, 곧 못질과 가시관과 채찍질과 멸시와 침 뱉음과 여타 모든 것을 다시 겪지 않을 수 없으며, 그것도 그때보다 한층 더 심하게 겪고 있다.

그런데 이『수난의 시간들』기도를 실행하고 있는 영혼들과 접촉하면 못들이 뽑혀지고 가시들이 흩어져 사라지며 상처들이 아물고 침이 다 닦인 느낌이 든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내게 저지르는 악이 선으로 보상되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나는 그들과의 접촉이 나를 해치기는커녕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내 『수난의 시간들』로 기도하는 사람들을 언제나 더욱더 의지하게 된다.”

이 밖에도 복되신 예수님은 이 『수난의 시간들』에 대하여 또 이렇게 말씀하셨다.
 “딸아, 영혼이 이 『시간들』을 실행하면 나의 생각을 취하여 자기 것으로 삼게 된다. 나의 보속과 기도와 열망과 애정을, 심지어 내 가장 내적인 기질까지도 자기의 것으로 삼게 된다. 그리하여 하늘과 땅 사이에 우뚝 서서 나와 같은 사명을 수행한다. 공동 구속자로서, 나와 함께, ‘하느님, 당신 뜻을 이루려고 제가 왔으니, 저를 보내 주십시오(Ecce ego, mitte me). 모든 사람을 대신해서 당신께 보상하며 응답하고, 모든 사람의 선익을 위하여 당신께 간구하나이다.’ 하고 말한다.”
 
1905년 6월 5일
복되신 예수님께서 오셔서 오늘 아침에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딸아, 십자가들, 극기의 고통들은 같은 수량의 세례의 샘물과 같다. 어떤 종류의 십자가(를 만나건) 내 수난에 대한 생각에 잠기게 되면 그 쓴맛이 절반으로 줄어들고 그 무게도 반감된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빛이 번쩍 하듯 모습을 감추셨다. 나는 마음속으로 흠숭기도와 보속을 바치면서 그대로 남아 있었는데, 그분께서 다시 오셔서 이렇게 덧붙이셨다.

“내 인성이 오랜 세월 전에 행했던 것이 네 안에서 재연되고 있음을 보면서 내가 어찌 위로를 느끼지 않겠느냐! 사실, 각 영혼에게 행하도록 내가 정해 준 모든 것은 전부 내 인성 안에서 (미리) 행해진 것들이다. 그러므로 영혼이 나에게 일치하면 내가 그를 위하여 행했던 것을 그의 내면으로 다시 행하게 된다. 하지만 그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것이 다만 내 안에서만 행해진 상태로 남아 있으므로 나로서는 말할 수 없는 쓰라림을 느끼게 된다.”
 
1913년 3월 24일
내가 내 자애로우신 엄마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을 때 예수님께서 해 주신 말씀도 여기에 덧붙여 보면 이렇다.
“딸아, 내 사랑하올 엄마는 내 수난에 대한 묵상을 그치신 적이 없었다. 이 거듭된 묵상에 의해서 그분 전체가 완전히 나로 충만하셨다. 내 수난을 거듭 생각하는 영혼에게도 같은 일이 일어난다.  이 묵상에 의해서 나로 충만한 경지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1918년 7월 12일  
어떤 두려움과 불안을 느끼면서 내가 임종 중인 한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을 때에 사랑하올 예수님께서 오셔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딸아, 왜 걱정하고 있느냐? 내 수난에 대한 낱말마다, 각각의 생각과 연민과 보속 및 내고통에 대한 기억마다, 그 모든 것이 나와 이 영혼 사이에 열리는 통신 전선들이 된다는 것을 모른단 말이냐? 그것이 그만큼 많은 수의 다양한 아름다움으로 그녀를 단장한다는 것을?  이 영혼이 『수난의 시간들』 기도를 실천했으니, 나는 내 피를 옷처럼 입혀 주고 내 상처로 단장하여 내 수난의 딸로 받아들이겠다. 이 꽃은 너의 마음 안에서 자라난 꽃이다. 그러기에 내가 이를 축복하여, 내가 각별히 사랑하는 꽃으로 내 마음 안에 받아들이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자 내 가슴에서 꽃 한 송이가 나와서 그분께로 날아가는 것이었다.
   
1921년 10월 21일
다정하신 예수님의 수난에 대해 생각하고 있노라니 그분께서 오셔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딸아, 영혼이 내 수난을 생각할 때마다, 내가 겪은 것을 기억하거나 나를 측은히 여길 때마다, 내 고통이 그 영혼에게 새로이 적용된다. 내 피가 솟아나서 그를 잠그고, 내 상처들이 그를 치유하거나 단장한다. 그가 상처를 입고 있으면 치유해 주고 건강하면 아름답게 단장해 주는 것이니, 내 모든 공로가 그를 부유하게 한다.
 
그러니까 영혼은 매우 놀라운 장사를 하는 셈이다. 내가 행했고 겪었던 모든 것을 판매대에 놓아 이윤을 갑절로 남기니 말이다. 사실, 내가 행하고 겪었던 모든 것은, 태양이 지구에 빛과 열을 끊임없이 주고 있는 것과 같이, 지속적으로 사람에게 베풀어지고 있다. 나의 업적은 고갈되는 법이 없다. 영혼이 원하기만 하면 원할 때마다 내 생명의 열매를 받는다. 그러므로 내 수난을 스무 번, 백 번, 천 번 기억하면, 그만큼 더 많은 효과를 누리게 된다.그러나 이를 소중한 보물로 여기는 사람은 얼마나 적은지! 내 수난의 모든 선익에도 불구하고 허약한 영혼들과 소경과 귀머거리와 절름발이들을 - 민망스럽도록 산송장이나 다름없는 영혼들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내 수난이 잊혀 가고 있기 때문이다. 내 고통과 상처와 피는 허약함을 없애는 힘이요, 소경에게 시력을 주는 빛이며, 혀를 풀고 청각을 열어 주는 혀이고, 절름발이를 똑바로 걷게 하는 수단이며, 죽은 사람을 일으키는 생명이다.

온 인류에게 필요한 모든 치료제가 내 생애와 수난 안에 있다. 그러나 인간은 이 약을 무시하고 이 치료제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의 모든 구원 사업에도 불구하고, 마치 불치의 폐병에 걸리기나 한 듯 죽어 가는 인간의 처지를 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내 마음을 가장 비통하게 하는 것은, 교의나 신학 이론이나 역사 따위의 탐구에 매진하는 교인들이 정작 내 수난에 대해서는 아무 일도 하지 않음을 보는 일이다. 그러므로 내 수난은 번번이 교회에서 쫓겨나고, 사제들의 입에서 추방당하곤 한다. 사제들의 말에 빛이 없는 것은 그 때문이니, 그들의 말을 들은 이들은 전보다 더 굶주린 상태로 있게 되는 것이다.”

 
1916년 10월 13일
 『수난의 시간들』을 묵상하고 있노라니 복되신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딸아, 내가 지상생활을 하는 동안 수천수만의 천사들이 내 인성을 수행하면서 내가 행하는 모든 것을 모아들였다. 즉, 나의 발걸음과 활동과 말을, 심지어 나의 탄식과 고통과 내 핏방울들을 - 요컨대 모든 것을 다 모아들였던 것이다.그들은 나를 보호할 책임을 맡고 나를 흠숭하며 내 모든 지시에 따르기 위하여 파견된 천사들이었으니, 내가 행하는 모든 것을 아버지께 가져가려고 하늘로 오르락내리락 하곤 하였다. 

그런데 이 천사들은 지금도 특별한 임무를 띠고 있어서, 어떤 사람이 내 생애와 내 수난과 내 피와 내 상처와 내 기도를 기억하고 있으면 그 사람 주위를 에워싸러 온다. 그의 말과 기도, 나에 대한 동정심, 그의 눈물과 예물을 모아서 나의 것들과 합하여 내 어좌 앞으로 가져옴으로써 나 자신이 지상에서 보낸 생애의 영광을 새로이 하려는 것이다. 이 천사들은 매우 큰 기쁨에 싸여 그 사람의 기도소리를 들으려고 공손하게 기다리며 함께 기도한다. 그러므로 이『시간들』을 기도하는 사람은 마음을 집중하여 경건하게 기도해야 한다. 천사들이 그를 따라 하려고 그의 입술에 주의를 쏟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러고 나서 그분은 이렇게 덧붙이셨다.
“이『시간들』은 사람들에게서 쓰디쓴 괴로움을 많이도 받고 있는 나에게 달콤한 음료 몇 모금을 주는 것과 같다. 그러나 내가 받는 저 쓰디쓴 물의 엄청난 양에 비하면 이 단물은 너무나 적다. 그러니까 이 기도를 더 널리 전파해야 한다. 더 널리!” 
   
1916년 12월 9일
 다정하신 예수님의 부재로 괴로워하고 있었다. 어쩌다 그분께서 오시면 좀이나마 생명의 기운을 들이쉬게 되지만, 나보다 더 괴로워하시는 그분을 뵙고 나면 더 괴로운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분께서는 진정하시라는 말을 듣고 싶어 하시지 않는다. 사람들이 강요하다시피 하면서 그분에게서 더 많은 징벌을 잡아채 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분은 징벌을 내리시는 동안에도 인간의 운명을 한탄하시며 내 마음  깊은 데로 숨어 버리신다. 인간이 겪는 고통을 차마 보실 수 없으신 모양이다. 과연 이 통탄할 시대에는 더 이상 살아갈 수가 없을 것 같다. 그럼에도 이는 다만 시작에 불과해 보인다.  그래서 나는 그토록 자주 그분을 뵙지 못한 채 지내야 할 내 고달프고 슬픈 운명을 걱정하며 속을 태우고 있었는데, 인자하신 예수님께서 오셔서 한 팔로 내 목을 싸안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딸아, 그런 걱정으로 내 고통을 가중시키지 마라. 그러잖아도 이미 너무 많다. 이건 내가 너에게서 바라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나는 네가 내 고통과 내 기도와 나 자신 전체를 네 것으로 삼기 바란다. 그러면 내가 네 안에서 또 하나의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 시대에는 크나큰 보상이 요구되는데, 나를 자기 자신으로 삼은 사람만이 그것을 내게 줄 수 있다. 

나는 아버지께서 내 안에서 보신 것, 곧 영광과 기쁨과 사랑과 모든 이의 선익을 위한 전적이고 완전한 보상을 이 영혼들 안에서도 보고 싶다. 나와 엇비슷한, 같은 수의 다른 예수들을 말이다. 그러므로 너는 『수난의 시간들』 중 매시간 기도를 바칠 때마다 각각의 행위와 모든 것 속에서 이 지향을 반복해야 한다. 내가 원하는 보상을 얻지 못한다면, 아, 이 세상은 끝장이 나고 말 것이다! 징벌에 징벌이 억수 같이 쏟아질 테니 말이다. 아아, 딸아! 딸아!”  그리고 그분은 모습을 감추셨다.
 3  ‘수난’ 매일 묵상의 중요성에 대하여...

그분께서 어떤 고통을 겪으셨습니까? 
그것은 세 가지 종류의 고통이니, 곧 육체적 고통과 치욕(恥辱)과 내적 비통입니다.

 (성 안니발레 디 프란치아는 우리 주님의 수난에 대한 묵상의 목적과 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은혜로운 효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글을 쓰기도 하였다. )  
 
무엇보다도 우선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한 묵상이 사랑하올 그분의 마음에 크나큰 기쁨을 드리는 일이라는 것과 마음을 다하여 열심히 실천하는 사람에게는 더없이 큰 영적 유익이 있다는 것입니다.
 
지극히 사랑하올 우리 인자하신 예수님의 고난을 날마다 꾸준히 묵상하는 데서 얼마나 많은 영적 은혜를 끌어낼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어떤 인간의 말로도 도저히 합당하게 표현할 수 없습니다. 영혼은 우선 우리의 거룩하신 구세주 예수님에 대한 사랑의 불이 나날이 마음속에서 타오르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여기에서 예언자 (다윗)의 이 말이 이루어집니다. “그 생각으로 내 마음에 불이 치솟았네.”6) 과연 영혼이 우리 주님 수난의 극단적인 성격 - 그 (사랑의) ‘극치’를 날마다 생각하면 무관심한 상태로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 극치를 이루는 점이겠습니까?


첫째로,고통과 수모를 겪고 계신 그분은  누구이십니까?
 영원하신 아버지 하느님의 영원하신 아드님, 아버지와 동등하시고 아버지와 함께 하늘과 땅과 천사들과 인류를 만드신 창조주가 아니십니까!  과연 그분은 땅을 두려움으로 떨게 하시는 분이시니, 그 진노의 눈길만 스쳐도 산들이 연기를 토하고, 지극히 숭고한 천사들의 합창대가 그분의 발치에서 경배합니다. 누가 그분에 대해 말할 자격이 있겠습니까?

얼마나 무한히 위대하신지, 우리의 지극히 거룩하신 마리아께서도 그 위대성 전체를 완전히 이해하실 수는 없을 정도이십니다!
사람이며 하느님이신 분, 지성소이신 그분이 바로 지극히 사랑하올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말로 다할 수 없이 아름다우시고 한없이 다정하고 자애로우시며 넘치도록 자비를 베푸시는 분, 천사들과 사람들로부터 모든 흠숭과 공경을 받아 마땅하신 이 신인(神人)께서, 우리에 대한 사랑 때문에 문둥이같이 두들겨 맞고 수모를 당하며 쏟아지는 비웃음에다 한낱 지렁이처럼 짓밟히는 신세가 되신 것입니다.  
 
둘째로, 그분께서 어떤 고통을 겪으셨습니까?
그것은 세 가지 종류의 고통이니, 곧 육체적 고통과 치욕(恥辱)과 내적 비통입니다. 이는 그 종류마다 헤아릴 수 없도록 깊은 심연을 이루는 (극한적인) 고통들입니다. 우리가 만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흠숭하올 몸으로 견디신 고통들을 깊이 묵상한다면, 이사야가 칭한 대로 이 “고통의 사람”7) 앞에서 진저리를 칠 것입니다. 성한 데라고는 한 군데도 없는 사람, 누구인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머리끝에서 발바닥까지 온통 하나의 상처가 되고 만 사람이니 말입니다!

“그에게는 우리가 우러러볼 만한 풍채도 위엄도 없었으며 우리가 바랄 만한 모습도 없었다.”8)
 
그러므로 성인들은 우리의 지고한 선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지극히 거룩하신 인성의 고통을 묵상하며 측은해서 눈물에 잠겼고, 사랑 때문에 실신하거나 갖가지 방식으로 자신을 매질하며 거듭 책벌하곤 했습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또 다른 고통은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말씀’께서 견디신 치욕입니다. 여기에서 관상적인 영혼의 소유자인 이 책의 저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지존하고 신적이며 지극히 거룩하신 몸이 심술궂고 사악한 인간들의 횡포에 - 속된 인간적 횡포라기보다는 악마적인 횡포에 내맡겨진 것을 보면서 정신을 잃을 지경이 됩니다. 그들이 잔혹하게도, 전능하시고 영원하시며 무한하신 분을 하고 많은 모욕과 수치로 뒤덮어 짓누르기 때문입니다!

그분을 냅다 밀어 땅바닥으로 던지고 짓밟으며 질질 끌고 가는가 하면, 그분의 지극히 거룩하신 얼굴과 존귀하신 입을 주먹으로 마구 치고 때리다 못해 발길질까지 하며 침을 뱉고 온갖 능욕을 가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종들은 이 형언할 수 없는 광경을 보면서 그 모욕과 수치스럽고도 비열한 행위들을 간절히 열망했습니다. 그것을 이 세상이 보유할  수 있는 가장 값진 보물로 여겼던 것입니다.  
 
또 한 가지, 하느님이시며 사람이신 분의 이루 말할 수 없는 세 번째 유형(類型)의 고통에 대해서 우리는 아주 조금 알거나 전혀 알지 못하거니와,
이 고통은 바로 그분께서 지극히 거룩하신 영혼으로, 사랑하올 그 지극히 다정다감하신 성심으로 겪으신 비통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가없는 바다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분께서 슬픔과 번민과 고뇌와 인간의 불성실과 배은망덕, 두려움과 공포를 무한히 견디신 바다입니다. 마치 서로 다른 네 가지 이유로 끝없이 쏟아져 들어오는 네 개의 폭포수처럼 모든 비통의 물살이 그분의 내면을 넘치도록 가득 채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이유 중 첫째... 
인간의 소름끼치는 모든 죄악상을 보시면서, 무한히 거룩하신 분이 마치 그 모든 죄를 짓기라도 하신 것처럼 책임지고 떠맡으셨다는 점이었습니다.

둘째... 
언제나 하느님의 가차 없는 정의를 보시면서 속죄 행위로 그 징벌의 고통을 치르셔야 하셨다는 점이었습니다.

셋째... 
간의 모든 배은망덕을 보시는 더없이 큰 고통, 그리고 멸망하기를 원하는 영혼들 - 그분의 수난에 의해 영원토록 더 불행해질 따름인 그 모든 영혼들을 보시는 끔찍함이었습니다.
 
오, 영혼 하나하나를 무한히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지극히 거룩하신 마음에 그것은 얼마나 심한 고문이었겠습니까!
이 때문에 그분은 예언자 (다윗을) 통해 “지옥의 고통이 나를 덮쳤네.”9)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치, “지옥에 떨어진 죄인들이 영원토록 겪을 극심한 고통을 나의 내면으로 느낀다.”고 하신 듯한 것입니다.

넷째...
그분의 성교회가 겪게 될 고통을 보신 점이었습니다. 그분의 선택을 받은 사람들이 현세에서 겪게 될 육체적 정신적 고통과 연옥에서 겪게 될 고통, 특히 선택을 받았으나 덕행에도 영원한 생명에도 이르지 못하게 될 자들이 겪게 될 고통이었습니다. 그분께서 친히, 온 세상을 얻는다고 해도 목숨을 잃는 행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씀하셨으니 말입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10)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혼과 육신이 받으신 이 끝없는 고통의 극한 속에 반드시 포함시켜야 할 것은 그 ‘지속성’입니다.  그분의 수난은 세족례가 있었던 목요일부터 금요일 오후 세 시까지만 지속된 것이 아니라, 동정 마리아의 지극히 순결하신 태 안에 강생하신 순간부터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시기까지 지속되었기 때문입니다.

34년 동안 영혼과 육신으로 끊임없이 말로 다할 수 없는 고뇌와 고통을 겪으셨으니, 이는 예언자가 이렇게 말한 대목에서 신비스럽게 성취된 것입니다. “당신의 폭포 소리에 따라 심연이 심연을 부릅니다.”11)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지극히 거룩하신 영혼은 짓누르며 으스러뜨리는 폭포의 힘에 의해 고통과 고뇌가 넘쳐흐르는 정신과 마음으로 심연에서 심연으로 가십니다. 고통이 다른 고통을 부르고, 또 다른 고통을 부르고, 이처럼 끝없이 지속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그분의 내면은 모든 이의 모든 죄를 맡아 속죄해야 하셨고, 선택되었으나 (멸망한) 이들의 영원한 고통과 그들의 현세적인 고통마저 다 겪으셨습니다!
 
그러니 사랑하올 우리 주님께서는 매순간 죽음을 겪으셨습니다.
너무나 엄청난 비통의 물살에 시달리셨으므로, 다만 사람이기만 하셨다면 매 순간 돌아가셨을 터이지만, 또한 하느님이기도 하셨기에 신성의 끊임없는 기적으로 인성의 생명을 지탱하셨던 것입니다. 그것은 그분의 고통을 극한까지 연장하여, 수난과 십자가상 죽음에 이르기까지 모든 고문과 모욕으로 그 고통의 최후를 장식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사실 우리의 지극히 높으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사랑으로 단 한 번의 죽음이 아니라 수천수만의 죽음을 치르셨습니다. 우리가 그리도 많은 은혜를 입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의 피조물 가운데에서 33년 3개월에 걸쳐 지상 생활을 하시는 동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은 온화하고 다정하며 평온하고 차분해 보이셨고, 업신여기며 웃어넘기는 법 없이 누구에게나 대화의 창을 열어 두고 계셨습니다. 측량할 수 없는 그 내적 고통의 심연 속에서도 그토록 깊은 평화와 차분한 평정의 상태를 유지하셨고, 이를 예언자 (이사야)의 말을 통해 썩 잘 표현하셨으니, 그것은 오로지 성령께서만 예언자에게 받아쓰게 하실 수 있는 표현이었습니다. “저의 쓰디쓴 쓰라림은 평화로 바뀌었습니다.”12)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흠숭하올 수난의 또 다른 극치는,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고 온 세상을 속량하기 위하여 그분께서 겪기로 작정하신 그 형언할 수 없는 영육의 모든 고통과 치욕이 그분에게는 사실상 필요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이 점을 묵상해야 합니다.
지극히 거룩하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태중에서 사람이 되신 그분으로서는 당신의 아버지 하느님께 단 한 번의 기도를 올리며 한 번의 흠숭 행위를 하시는 것만으로도, 또 지극히 보배로운 피를 딱 한 방울만, 곧 사람이 바늘로 한 번 찌를 때 나오는 정도의 피만 흘리셔도, 다만 하나가 아니라 수없이 많은 세상들도 넉넉히 구원하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하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행동은 그 하나하나가 다 무한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분께서 왜 그리도 많고 잔혹하며 쓰디쓰고 괴로운 고문과 고통과 치욕과 고뇌의 바다에 빠지기로, 아니 잠기기로 작정하셨겠습니까?
예언자 (다윗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실 정도가 아니었습니까?  “물속 깊은 곳으로 빠져, 물살이 저를 짓칩니다.”13)

오, 예수님 마음의 한없는 사랑의 신비여!
수백만 개의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 것도 그분께서 우리에 대해 품고 계신 사랑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분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즉, 당신 사랑의 극치를 우리에게 보여 주시기 위함이었고, 또한 말씀의 표현과 속죄와 놀라운 모범이 가득할 뿐더러 그분의 지극히 다정하고 자상하신 사랑의 명백한 증거와 입증도 가득한 구원 사업을 받아들이도록 우리를 준비시키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성 바오로 사도는 “누구든지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으라!”14) 하고 아주 단호하게 말했던 것입니다.

만일 우리의 마음이, 이토록 형언할 수도 끝도 없는 고통의 증거와 함께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어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며 끌려고 하시는 이 ‘연인’에게
아무런 감동도 느끼지 못한다면, 대관절 어떤 종류의 마음이겠습니까? 그렇게 굳고 무감각한 마음이 되는 원인 중의 하나는 우리의 지고한 선이신 분의 흠숭하올 수난을 날마다 묵상․관상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 이는 너그럽게 덮어 줄 수 없는 태만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34년 동안 지겨운 줄 모르고 괴로움과 극심한 격통과 단말마의 고통을 겪으신 반면, 우리는 영혼의 눈길을 그 형언할 수 없는 고통에 두고 반시간만 묵상해도 지겨워하곤 합니다. 하지만 그것을 견디신 그분은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아들이시고, 성인 중의 성인이시며, 아무런 허물이 없는데도 우리를 위하여 ‘죄’가 되신 분,15)  즉, 충성스러운 세례자 (요한이) 선포한 대로, 모든 죄를 없애는 산 제물이 되신 분이십니다!
이 때문에 성 보나벤투라는  “그리스도께서 지겨워하지 않으시며 견뎌 내신 것을 우리가 지겨워하며 묵상해선 안 됩니다.”라고 썼으니, 과연 옳은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스럽고도 수치스러운 수난 속에서 그 무한한 사랑의 또 다른 극치를 보아야 합니다.
이는 우리 마음의 굳음이나 냉랭함을 쳐서 흩어 버리고, 영원한 사랑으로 영혼들을 사랑하시는 ‘거룩하신 연인’에 대한 사랑에 우리를 온전히 묶어 주는 마지막 일격과도 같은 극치이고, 비록 우리의 마음에 감동을 일으키지는 못하더라도, 우리가 그 지독히 악한 잔인함으로 하여 멸망의 비탈에 내던져지고도 남을 극치임에 틀림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주 그리스도께서 온 인류 세대, 곧 무수한 영혼들에 대한 사랑으로 그들의 구원을 위해 겪으신 모든 것을 개개의 영혼을 위해서도 똑같이 겪으셨다는 점입니다. 이는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만 존재했다고 해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구원하시려고, 온 인류의 구원을 위해 행하시고 견디셨던 모든 것을 행하시고 견디셨을 것임을 뜻합니다. 

그러니, 친애하는 독자여, 만일 그대의 영혼이 구원될 필요가 있는 하나뿐인 영혼이었더라도,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오직 그대를 위하여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셔서 고통을 받을 수 있는 육을 취하시며 사람이 되셨을 것이고, 34년 동안 한 순간도 그치지 않고 영혼과 육신의 고통을 받으셨을 것이며, 오직 그대를 위하여 고통과 수모와 고뇌와 채찍질과 가시관과 십자가와 죽음에 그분 자신을 넘겨주셨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현재와 과거와 미래의 모든 영혼들을 한꺼번에 사랑하는 것과 같은 사랑으로 한 영혼을 사랑하시는 것이 변함없는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대체 누가 이 무한하신 사랑 앞에서 무덤덤한 마음으로 있을 수 있겠습니까?
 구원자이신 하느님의 고통스럽고 치욕스러운 수난을 관상하는 영혼은 다음 점을 생각하면서 그렇게 할 일입니다. 즉, 이렇게 자기 생각을 표현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를 위해 예수님께서 34년간 고통을 받으셨다.
나를 위해 그분께서 (겟세마니) 동산에서 피땀을 흘리셨다.
나를 위해 그분께서 잡혀가셨다.
나를 위해 그분께서 재판석 앞으로 끌려가셨다.
나를 위해 그분께서 수치와 주먹질과 침 뱉음과 매질을 당하셨다.
나를 위해 그분께서 채찍질과 가시관 씌움과 사형 선고를 받으셨다.
나를 위해 그분께서 갈바리아를 오르시어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세 시간 동안 임종 고통을 치르셨고,
그 사이 목마름을 겪으시며 쓸개와 식초 맛을 보셨고 저버림을 당하셨다.
나를 위해, 나에 대한 사랑 때문에, 그분께서 고통의 깊디깊은 심연에 잠겨 돌아가셨다!’
 
우리가 고통의 예수님을 잊는다면 정녕 배은망덕한 인간이 될 것입니다!
하찮은 구더기에 불과한 우리가, 우리에 대한 사랑 때문에 그분께서 겪으신 그 모든 것을 잊는다면 말입니다! 그분께 우리가 필요하기나 했겠습니까?
오, 아닙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피조물이 하나도 없었어도, 그분 자신의 신성에 의해, 사실 그대로, 영원토록 무한히 행복하셨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성 안니발레는 독자에게 자신이 주인을 거역하는 죄를 지은 노예라고 가정해보라고 한다. 주인의 아들은 죄 지은 노예를 구하려고 자신의 목숨을 바친다)
 
우리 각자는 죄를 범한 노예로서 하늘과 땅의 임금이신 지존하신 하느님 앞에 서 있습니다. 영원한 죽음과 영원한 고통을 받아 마땅한 노예입니다. 그런데 이 노예에 대한 헤아릴 수 없도록 무한한 사랑에 사로잡히신 하느님의 외아드님께서, 그 영원하신 아버지의 영원한 낙(樂)이신 그분께서 당신 아버지 앞으로 가시어 이렇게 말씀드리십니다.
 
“저의 아버지,
아버지의 거룩하신 정의는 저 비참한 노예를 해방시키려면 아버지께 합당한 산 제물을 바쳐야 한다고 요구하십니다. 한데 저 말고는 아무도 그만한 공로의 배상을 드릴 수 없습니다. 그러니 저를 죽이시고, 저 노예를 살려 주십시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는 그래서 우리를 위해 고난 받고 돌아가시기 위해 당신을 지상에 보내 달라고 아버지께 청하십니다.
예언자 이사야의 말대로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 (Ecce ego, mitte me.)16) 하고 아뢰시는 것입니다.
 
“Ecce ego, mitte me. 제가 여기 있으니, 땅으로 보내십시오. 고통을 받을 수 있는 몸 안에 저를 가두시어, 저 노예에 대한 사랑으로 더없이 잔인하고 괴이하여 형언할 수도 없는 고통을 겪고, 지극히 괴롭고 수치스러운 죽음을 죽게 해 주십시오.

저는 노예를 대신하고자 합니다. 제가 노예처럼 묶여 재판석 앞으로 끌려가고, 부당한 재판을 받을 것이며, 아무 죄가 없는데도 악행을 저지른 자로 유죄 판결을 받을 것입니다. 저는 저 불쌍한 노예에게 그에 대한 저의 사랑이 어느 정도인지를 보여 주고 싶습니다. 그가 자유롭고 행복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저는 모욕 받고 두들겨 맞으며 단죄를 받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의 불명예와 수치, 누구든지 밟고 다니는 구더기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오, 저의 아버지, 한 가지 청을 드리오니, 저 노예가 아버지께 충성스럽고 감사히 여길 줄 알거든, 그가 저인 것처럼 아버지의 은총 안으로 들어가게 해 주십시오. 저를 사랑하시는 것처럼 그를 사랑하시며 양자로 삼으시어, 그가 현세에서나 내세에서나 우리의 영원한 재산을 나누어 받게 하시고, 저의 십자가상 죽음의 공로로 풍성한 은총을 받으며 고통 중에 위로를 얻게 해 주십시오. 피할 수 없는 삶의 고통이 그에게는 빛이 되게 하시고, 그의 죄에 요구되는 보속이 영원한 공로가 되게 하시어, 현세에서 평온하게 선종한 다음 우리에게 와서 우리의 기쁨에 참여하면서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다스리게 해 주십시오.”  
 
‘하느님의 말씀’께서 이것과 또 더 많은 말씀을 아버지께 드리자,
아버지께서도 그 비참하고 유죄한 노예 (이 노예는 곧 이 글을 쓰고 있는 저 자신이며, 오, 독자여, 바로 그대이기도 합니다.) 에 대한 사랑으로 불타오르시어, 아드님께서 큰 소리와 탄식과 눈물로 간청하신 모든 것을 들어주셨습니다. 사도 성 바오로가 말한 것처럼 아드님은 “큰 소리로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며....... 탄원을 올리셨고, 하느님께서는 그 경외심 때문에 들어주셨습니다.”17)    
 
그리하여 성인 중의 성인 (흠 없고 지극히 깨끗하고 순결하신 ‘어린양’)이 그 비참하고 반항적인 노예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갖가지 비통에 넘겨주신 채 34년 동안 한 순간도 그침 없이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 가운데에서 사시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영혼과 육신의 이 고통들이 마침내 그분의 가공할 만한 수난 속에 집결되었고, 이 수난은 세족례가 있었던 성목요일 저녁부터 성금요일 오후 세 시까지 지속되었다. 이 시각에 그분은 가장 비열하고 사악한 죄인처럼 십자가 처형대에서 돌아가셨으니, 그 당시 그것은 가장 수치스러운 죽음이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의 거룩하고 영원하신 연인께서 얼마나 여러분을 사랑하셨는지를, 여러분을 위해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으며 인내하셨는지를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지고한 선이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우리에 대한 사랑으로 겪으신 그 모든 것을 잊는다면, 여러분이나 저 자신이나 차가운 쑥돌보다 더 단단하고 야수보다 더 사나운 자들이 아니겠습니까?  
 
오, 그리스도인들이여,
그대들을 위해 고난 받고 죽기로 작정하신 예수님께서 그대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오, 얘야, 오, 나의 모든 피를 쏟아 속량할 작정인 영혼아,
너에게 당부한다. 내 사랑에 대한 보답과 보상으로, 내가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았는지를 결코 잊지 마라.  내가 이제 겪으려고 하는 내 지극히 거룩한 몸의 고통을 자주 기억하기 바란다. 너를 영원한 죽음에서 빼내려고 내가 고통과 죽음에 대한 인간적인 혐오감과 싸워 이기리라는 것, 그리하여 고통 받으며 피를 흘리리라는 것을 기억하여라.

오, 너를 위해 내가 얼마나 비싼 대가를 치를 것인지를 기억하여라.
너를 사랑하는 까닭에 나의 온유한 얼굴을 주먹질과 침 뱉음에, 수염을 뽑는 잔인한 행위와 온갖 타격에 내놓을 것이다. 가시관을 보아라. 이것이 내 이마를 찌를 터인데, 이는 사람도 천사도 그 어느 피조물도 알지 못할 아픔을 내게 끼칠 것이다. 그런 다음 저들은 내가 마치 살 자격이 없는 것처럼 사형 선고를 내릴 것이고, 몹시도 무거운 십자가를 지게 할 것이다... 잘 있어라, 귀엽고 소중한 내 아들, 내 마음의 기쁨아, 다시는 노예가 되지 말고, 내 나라의 상속자가 되어라. 안녕.
      
더 혹독한 고통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팔다리가 끔찍하게 잡아당겨져 십자가에 못 박힐 것이니, 나는 세 시간 동안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하고 내 아버지를 포함해서 모든 이에게 버림받은 채 영혼과 육신이 너무나 비참하게 짓눌린 나머지그 최후 고통의 세 시간이 삼백 년같이 느껴질 것이다. 이처럼 너를 위하여 모든 것을, 모든 것을 겪을 것이다. 

네가 내 고통과 죽음을 잊어버릴 정도로 배은망덕하면 쓰겠느냐?
나는 기꺼이 내 고난의 길을 오르며, 기꺼이 십자가를 지고, 기꺼이 나를 기다리는 무서운 고통을 다 받아들이겠지만, 네가 이것을 약속하면 그 수치스럽고 쓰디쓴 죽음이 내게 빛이 될 것이다. 그것은 네가 나의 수난과 죽음 및 너를 위해 그 둘을 다 겪은 내 무한한 사랑을 잊지 않겠다는 약속이다.”
 
오, 영혼이여,
그런즉 그대는 그대의 거룩하고 사랑하올 구원자, 그대의 하느님께 어떻게 응답해야 하겠습니까?
 
 참 사람이시며 참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것을 미리 내다보셨습니다.
그분의 흠숭하올 수난과 죽음에 대한 묵상을 전혀 하지 않거나 거의 하지 않는 사람들의 용서할 수 없는 냉담함과 무관심을 보시는 한편, 이 유익하고 마땅한 묵상에서 날마다 양식을 얻는 영혼들의 독실하고 거룩한 열정도 보셨습니다. 그러므로 갈바리아를 오르시면서 앞의 사람들 때문에 가슴이 미어지는 아픔을 느끼셨고, 나중 사람들의 성실과 사랑에서 위로를 받으셨습니다.
 
독자여, 그분께서 그대에게서는 무엇을 보셨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리도 많은 고통으로 속량된 그대가, 누가 자기를 속량했으며 그 많은 고통을 겪으셨는지를 잊어버리고 만다면, 여전히 노예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다 우리 영혼의 사랑하올 연인이신 분의 수난과 더없이 잔인한 죽음을 그대의 죄와 배은으로 새롭게 하면서 세속의 헛되고 하찮은 것을 더 좋아할 수 있겠습니까?
 
아, 정말이지 우리는 묵상해야 합니다!
지극히 사랑하올 우리 구세주 예수님의 소중한 수난을 날마다 묵상해야 합니다!
(앞서 언급한 성 보나벤투라의 지적대로)
“그리스도께서 지겨워하지 않으시며 견뎌 내신 것을 우리가 지겨워하며 묵상해선 안 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극히 거룩한 수난에 대한 매일의 묵상은 이를 날이면 날마다 실천하는 사람들에게 돈으로 살 수 없는 귀한 것들을 줍니다.
그것은 우리를 사랑과 감사로 가득 채우고, 죄에 대한 실제적이고 값진 회개가 생겨나게 합니다. 이는 현세적인 징벌이거나 영원한 징벌에 대한 공포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죄를 뉘우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세속적인 것에서 이탈하게 하고 죄에서 등을 돌리게 합니다. 그런 것들은 이 거룩한 묵상과 공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난폭하지 않은 사랑으로 우리의 나쁜 격정들을 죽이고, 영을 정화시키며, 지식과 지혜를 불어넣고, 완덕에 대한 간절한 열망을 불러일으키며, 영혼이 고통 중에 있을 때에 힘을 주고, 아낌없는 마음으로 희생하게 하며, 나날이 성화 은총이 더해지고, 마침내 하느님과 완전한 합일에 이르도록 박차를 가합니다.

그러므로 성 보나벤투라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오, 사람아, 덕행에서 덕행으로, 은총에서 은총으로 성장하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날마다 우리 구세주의 수난을 묵상하라.”18)
 
흠숭하올 우리 구세주, 우리 마음의 지고한 선이신 분의 수난을 사랑을 기울여 매일 묵상하는 영혼은 수난 중이신 예수님과 함께 묵상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예수님께서 그 영혼을 도와주시고 열중하게 하시며 참회로 채우시고, 그에게 깊은 감동을 주시고 빛을 비춰 주시며, 사랑이 불타게 하시고 때로는 눈물이라는 귀한 은총의 선물도 주십니다.

이 선물은 이 세상의 여덟 가지 참행복 중의 하나이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19)
 
그러니 뽑힌 영혼들 가운데에서 수난의 고통스러운 광경을 매일 묵상한 끝에 결국 내적 무미건조와 무관심이 너무나 깊은 감동과 눈물과 흐느낌과 탄식으로 바뀐 사람이 여럿 있는 것입니다. 지고한 선이신 분께서 우리에게도 그처럼 큰 은총을 허락하시고, 이 애정 어린 묵상에 항구할 수 있는 인내력도 주시기를 빕니다.

우리는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우리 주님의 수난을 두고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눈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는 글을 읽지 않았습니까?
예언자 즈카르야는 그리스도교도 전체의 역사를 통틀어 그리스도 예수님을 사랑하는 영혼들이 그분의 수난을 두고 흘릴 모든 눈물을 미리 보고서,
“그들은 외아들을 잃고 곡하듯이 그를 위하여 슬피 울 것이다.”20) 하고 말했습니다.
 
사실 영원한 생명이 예정되는 표징들 중에서 이보다 더 훌륭한 실천이 있을지 의문입니다. 사도의 말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동정하며 따뜻이 대하면, 그분과 함께 영광스럽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참아 받으신 고통과 수치와 번민에 관심을 가지고 지금 우는 사람들은 언젠가는 당연히 그분의 기쁨과 영원한 행복에 동참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매일 묵상하는 것에서 오는 또 하나의 큰 이점은,
영원하신 아버지로부터 갖가지 은총을 받기 위한 한층 더 효과적인 방법을 획득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님의 수난 신비에 익숙한 이들이 적지 않은데, 그들은 거룩하신 아버지께 순종하면서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지 청하는 일종의 권리를 얻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녀 제르트루다에게 주신 한 계시에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 아버지께서는 내 수난과 함께 청하는 것은 아무것도 거절하지 않으신다.”
우리는 그러므로 우리 주 예수님께서 그 엄청난 고통과 굴욕을 당하신 주된 목적이 그분의 영원하신 아버지를 향한 사랑과 순종과 열정이었음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분께서 복음서를 통해 우리에게 이 말씀을 남기신 것은 그 때문이다.
 
“지금까지 너희는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다.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의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21)  
 따라서 영원하신 아버지께 올리는 청원기도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의 공로를 통해 가장 큰 효력을 내는 곳은,  위대한 희생 제물이 제헌되는 미사성제입니다.
비록 광분한 폭력도 피 흐름도 느낄 수 없지만 골고타의 신비가 그대로 재현되기 때문이다. 지극히 거룩한 성찬례는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부단히 기억하는 것이 아닙니까? 이런 이유로 우리 주님께서 세족례의 목요일 저녁에 성체 성사를 제정하셨으니, 적대자들이 그분의 수난과 죽음을 준비하고 있었을 무렵, 인간에 대한 그분의 무한하신 사랑의 극치로 이 성사를 제정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을 받아 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 줄 내 몸이다.......
이것을 받아 마셔라. 이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내 피의 잔이니,
죄를 사하여 주려고 많은 이를 위하여 흘릴 피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22)
 
위의 견지에서 볼 때, 누가 우리 주님의 수난을 지극히 거룩한 성체 성사에서 떼어 놓거나, 지극히 거룩한 성체 성사를 우리 주님의 수난에서 떼어 놓을 수 있겠습니까?
 
여기에, 거룩하신 구세주의 수난과 죽음을 날마다 묵상하는 데서 오는 또 하나의 크고 엄청난 이점이 있으니, 바로 제단의 지극히 거룩한 성사에 대한 지식과 사랑과 애착에 성장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발치에서 감실의 발치에 이르러 여기에서 경배하고 사랑하면서 영성체를 통해 하느님과 지극히 긴밀한 일치의 경지로 올라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극히 거룩하신 성체를 영하기 한 시간 전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묵상하는 것을 소홀히 하면 안 될 것입니다. 특히, 날마다 이 ‘천사들의 (잔치) 식탁’에 다가가는 큰 은총을 받은 영혼들은 먼저 우리 주님 수난의 어떤 대목을 반드시 묵상해야 합니다. ‘교회 박사’인 성 알폰소는 『하느님 사랑의 작은 작품』에서 영성체 준비를 시작할 때에 아가 중의 다음 구절을 읊는 것으로 이 생각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내 연인의 소리!) 보셔요, 그이가 오잖아요. 산을 뛰어오르고 언덕을 뛰어넘어 오잖아요.”23) 성인은 이 구절을 이런 말로 해석한 것입니다.
“오, 거룩하신 구세주 예수님, 당신께서는 험난하고 가파른 언덕을 얼마나 많이 뛰어넘어야 하셨는지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흠숭하올 수난 묵상에 소홀한 사람은 결코 열렬한 영성체를 할 수 없고, 따라서 실질적인 유익을 거기에서 끌어낼 수도 없을 것입니다.
 
독자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에 대한 매일의 묵상은 위에서 언급한 은혜들과 - 저처럼 비참한 인간으로서는 설명할 수도 없는 - 다른 많은 은혜들을 우리 안에 낳아 주지만, 그 외에도 우리가 높이 존중해야 할 또 하나의 큰 선을 낳아 주기도 합니다. 이는 모든 피조물 가운데서 가장 순결하고 거룩한 피조물이시며 바로 사람이 되신 ‘하느님 말씀’의 어머니이신 지극히 거룩하신 동정 마리아의 동정심에 우리를 일치시키는 은혜입니다.
 
오, 여기에, 그리스도인이라면 소홀히 대하지 말아야 할, 또 하나의 사랑과 고통의 신비가 있습니다!
고통과 비탄에 잠기신 성스러운 마리아, 거룩하신 구세주의 모든 고통을 함께하신 ‘순교자들의 모후’! 
하느님이시며 사람이신 분과 하나 되어 인류의 공동 구속자가 되신, 지극히 거룩하신 마리아의 신비입니다! 
 
이 위대하신 ‘하느님 어머니’의 고통을 날마다 묵상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어떻게 그것을 이해하거나 통찰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구체적인 것도 눈에 보이는 것도 아닌, 온전히 내적인 고통이요 비탄이지만, 자신의 아들이며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 어머니의 측량할 수 없는 사랑만큼이나 무한한 것입니다.

여기에도 더할 수 없는 극점(極點)들이 있습니다. 지극히 거룩하신 이 어머니는 여성적 모성적 감수성의 예민도에 있어서나 - 원죄 없고 더없이 순결하며 거룩하고 슬기로운 동정녀께서는 이로 인해 내적 고통도 그만큼 더 날카롭게 느끼셨습니다. - 또한 예수님에 대한 사랑의 폭과 인식의 정도에 있어서나 극치를 보이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마리아 안의 사랑으로 말하자면 모든 ‘사랍’(Seraphim)의 열정을 능가할 정도로 무한한 것이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한없이 높은 존엄과 품위에 대한 인식 역시 무한한 것이었는데, 이 예수님이 수치스러운 모욕을 당하며 구더기처럼 짓밟히시는 광경을 보셨으니, 그 고통이 어찌 극한적인 고통이 아니었겠습니까?
 
이 어머니의 또 다른 극치는 모든 인류와 개개의 영혼에 대한 연민의 무한성이었습니다. 각 영혼을 위하여 당신의 거룩하신 아들을 고통과 모욕과 죽음에 내어 주셨고, 그것도 완전히 자원해서 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는 동안에도, 멸망하기를 원하는 영혼들을 모두 알고 내내 마음 쓰시면서 말입니다! 홀로 그분만이, 강생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의 심적 번민과 고통을 알고 함께 나누실 수 있었고, 그 고난의 잔의 마지막 방울까지 남김없이 맛보실 수 있었습니다.
 
이런 까닭에, 교회 서적 저자들의 글에 나타나듯이, 지극히 거룩하신 동정녀의 순교는 거룩하신 우리 구세주의 강생에서부터 죽음의 순간에 이르기까지 그 고통의 강도가 점점 더 높아지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사이에서 지극히 거룩하신 동정녀의 비탄이라고 불리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이 어머니의 불가항력적인 슬픔 이상의 성격을 띤 비탄입니다. 또 우리는 이 원죄 없으신 어머니께서 주님의 부활 사건 이후 더없이 큰 고통을 느끼신 또 하나의 시기를 목격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모든 영혼들에게 복되신 예수님의 수난을 묵상할 의무와 그 묵상 방법을 가르치는 훌륭하고 합당한 학교라고 볼 수 있는 시기로서, 그분의 여생 동안 계속된 것입니다. 그 기간을 혹자는 12년으로 보았고, 혹자는 16년, 혹자는 21년으로 보았습니다.
 
지극히 거룩하신 동정녀께서는 이 시기 전체에 걸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고통을 하나하나 마음 안에 되살리셨습니다. 홀로 그분만이 예수님께서 지극히 거룩하신 당신 인성으로 참아 받으신 고통들을 속속들이 기억하며 꿰뚫어 보실 수 있었고, 예수님께서 자원해서 겪고자 하셨던 모욕과 무엄한 행위들 및 예수님의 거룩하신 마음과 영혼이 겪으신 더욱 엄청난 고통까지도 간파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어머니께서 그 거룩한 고통들을 하나하나 다 기억하시면서 자신의 내면 안에 너무나 생생하게 되살리신 나머지, 하느님의 권능이 계속 이분을 지탱해 주시지 않았다면 그 숱한 고통과 비통으로 말미암아 숨이 끊어질 정도였으니, 그것은 우리 주님의 수난 동안 하느님의 권능이 계속적인 기적으로 주님의 생명을 지탱하신 것과 같았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지극히 거룩하신 동정녀께서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순전히 그 고통 때문에 돌아가셨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지내신 기간 동안 그분은 당신의 거룩하신 아드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신 모든 지점을 언제나 찾아다니셨고, 특히 주님께서 사형 선고를 받으신 빌라도의 관저에서 시작하여 갈바리아까지 계속 올라가는 ‘십자가의 길’을 깊고도 비통한 묵상에 잠겨 개인적으로 따라가곤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우리 성교회의 가장 거룩한 신심 수행 중의 하나인 ‘십자가의 길’ 기도가 태어난 것입니다.    
 
우리는 또한 고통과 비탄에 잠기신 마리아 안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에 대한 묵상을 가르치는 학교도 볼 수 있으니,
오, 예수님과 어머니 마리아 사이에서, 이 두 분의 고통 안에서 시간을 보내는 영혼은 참으로 행복합니다! 이 영혼은 때로는 아드님과 함께 때로는 어머니와 함께 동정심을 표현하고, 때로는 어머니와 함께 때로는 아드님과 함께 울며, 때로는 (겟세마니) 동산의 광경을, 때로는 예수님께서 잡히시고 법정으로 끌려가시어 주먹질, 침 뱉음, 채찍질, 가시관, 사형 선고를 받으시며 갈바리아를 오르시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세 시간 동안 임종 고통을 치르시며 목마름과 저버림을 당하신 일을 머릿속에 떠올리고, 그런 다음 이 사랑과 고통의 신비 속에 전적으로 동참하신  ‘하느님의 어머니’께로 영혼의 눈길을 돌립니다.

모든 어머니 가운데서 가장 큰 고통을 겪으신 이 어머니는, 비록 온전히 영적으로 겪으셨다고 해도, 그리스도 예수님과 함께 그 동산과 잡힘, 모욕, 채찍질, 가시관, 갈바리아 길, 못, 십자가상의 임종 고통과 그 쓰디쓴 죽음을 그대로 나누셨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과 성모님의 지극히 거룩하신 성심 안으로 들어가서 그 내적 비탄의 심연을 좀이나마 볼 수 있는 영혼은 행복합니다! 그리하여 끝없는 바다처럼 큰 통회(magna velut mare contritio)의 격랑 (激浪)속으로 들어가, 예수님과 성모님의 고통을 날마다 묵상하면서 애타는 마음으로 사랑의 눈물을 쏟는 영혼은 참으로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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