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루이사의 삶과 사명 그리고 루이사가 쓴 일기들에 대한 이야기
 카롤로스 신부님의 제 3 강의 / (2010. 9. 7. 사제 피정)



 ♱ 주 우리 하느님,  (이마에 작은 십자성호 )
 ♱ 십자성호로  (입술에 작은 십자성호 )
 ♱ 저희를 원수들에게서 구하소서. (가슴에 작은 십자성호 )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큰 십자성호)
 
 항상 거룩하시고 나누임이 없으신 삼위일체 하느님,  저희는 십자성호로 당신을 청해 모시고 당신의 현존 안에서 이 모임을 시작하나이다.
 당신의 축복으로 은총과 저희의 세례 봉헌이 새로워지게 하시고,  당신의 모상이 되게 하신 은혜 안에 저희를 굳건하게 하시며, 
 당신 뜻의 생명이 저희 영혼을 다스리게 하소서.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의 뜻이시여, 오셔서 저의 말씀 안에서 말씀하소서.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의 뜻이시여, 오셔서 저의 숨 안에서 숨 쉬소서.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의 뜻이시여, 오셔서 저의 심장 안에서 고동치소서.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의 뜻이시여, 오셔서 저의 활동 안에서 활동하소서.
 
 주님의 기도. 성모송.
 
 9월 7일 하느님의 뜻 영성 피정을 계속하겠습니다.  오늘 이 세 번째 강의를 루이사의 삶에 봉헌합니다.

 
(1)  루이사 피카레타 협회가 창설되고 시복 과정 재판이 시작되다
 
제가 어제 여러 이름들을 말하면서 몇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는데, 오늘은 조금 더 추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어제 말씀드렸던 사람 중에 아주 중요한 분이 아숨타 수녀님이십니다. 아숨타 수녀님은 처음에 구스타보 신부님의 그룹하고 같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코라토에 어려운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할 때, 구스타보 신부님과 다른 신부님들은 코라토를 떠났습니다. 이것은 1980년의 일인데 아숨타 수녀님은 코라토에 남으셨습니다. 코라토에 계시면서 코라토 사람들과 함께 하나의 조직을 만들었습니다. 그 기간 동안에 아숨타 수녀님은 트라니 교구 주교님의 꾸리아에서 봉사하며 도와드렸습니다.

 
1987년에 카라타 대주교님의 승인 하에 루이사 피카레타 협회를 창설했습니다. 그래서 루이사 피카레타 신심 협회가 생겨난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 안 되어서 루이사 피카레타가 살던 건물을 구입하게 되었습니다. 그 건물이 낡고 나쁜 상태였기 때문에 그것을 다 고쳤습니다. 그 건물을 수리하고 그곳에 루이사가 쓰던 침대도 놓고 루이사의 유물들도 다 거기다 두었습니다. 또 1층에 경당을 만들어서 축성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이 협회가 성장하고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이 협회의 주목적은 시복 과정을 추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로마로부터 루이사의 시복 과정을 시작하는 은총을 얻기 위해서 노력했습니다. 이 협회가 로마에 계신 추기경님들과 이태리의 모든 주교님들에게 루이사의 시복 과정의 소송 재판을 시작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기를 청원하는 서신을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노력하기 시작한지 6년 만에 마침내 시복 과정 재판을 시작할 수 있는 은총을 받았습니다.
 

기억하시겠지만, 1994년에 바티칸에서 카싸티 주교님에게 시복 과정을 시작할 수 있는 닐 롭스타를 보냈다고 어제 이야기했었습니다. 그래서 루이사 피카레타 협회가 시복 과정을 추진하는 추진자가 되었습니다. 루이사의 시복 과정의 추진자는 트라니 교구가 아니라 루이사 피카레타 협회였습니다. 루이사 피카레타 협회는 계속해서 그곳에 있으면서 이태리 전체에 루이사 피카레타의 하느님의 뜻 영성을 전파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코라토의 루이사를 방문하기 위해서 오는 전세계의 방문자들을 환영하는 그런 임무도 수행하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루이사 피카레타 협회만이 직접적으로 하느님 뜻의 영성을 전파하는 것이 아니고, 세상에는 루이사 피카레타의 영성을 전파하는 다른 기관들도 있습니다. 우리 협회, 하느님 뜻의 집처럼 온 세계에 하느님의 뜻을 전파하는 다른 기관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루이사 피카레타의 시복 과정 재판을 추진하는 것은 코라토에 있는 루이사 피카레타 협회 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시복 과정의 추진자는 아닙니다.
 

코라토에는 루이사의 집이 있고, 시복 과정 재판을 추진하는 추진자인 루이사 피카레타 협회가 있고, 그래서 코라토는 루이사 피카레타의 시복 과정 재판을 추진하는 것들의 중심지(센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루이사가 코라토에서 살았기 때문입니다.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전파하는 것은 꼭 코라토의 그 단체나 협회만이 아니라 온 사방 여러 곳에서 하느님의 뜻이 전파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코라토에 있는 루이사 협회가 다른 기관에서 하느님의 뜻을 전파하는 것을 통제하거나 하지는 없습니다. 우리는 코라토에 있는 루이사 피카레타 협회와 아숨타 수녀님과 교구의 주교님과도 좋은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제 말한 대로 우리도 루이사의 시복 과정에서 많은 일을 했고 또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일을 계속한 결과 니카라과에서 니카라과 주교님의 승인 하에 하느님 뜻의 집이, 협회가 생긴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 질문이 있으시면 질문서를 써서 내어 주시면 나중에 대답을 해드리겠습니다.
 
셋째 강의는 루이사의 삶과 사명과 루이사가 쓴 작품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드리겠습니다.
 
 
(2) 루이사는 사랑의 희생 제물로 자신을 주님께 맡기다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1865년 4월 23일에 코라토에서 루이사가 태어났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1874년 코라토의 모(母) 교회에서 루이사는 첫영성체를 하고 견진을 받았습니다. 그녀의 자서전에서 말한 대로, 그때부터 루이사에게는 영성체가 제일 좋아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모든 애정을 영성체에 집중해두고, 성체를 지극히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자기에게 말씀해 주시는 것을 듣기를 좋아했습니다. 


영성체를 못하고 주님께서 자기한테 말하는 것을 듣지 못하게 되는 것이 가장 괴로운 일이었습니다. 가끔 가족들과 같이 농장에 가야 돼서 어떤 때는 몇 달씩 미사에도 못 가고, 영성체도 못하는 것이 루이사에게는 가장 괴로운 일이었습니다. 루이사는 11살에 성모님의 딸이 되었고 몇 년 후에는 도미니꼬회의 제 3회원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17살이 되었을 때, 루이사는 사랑의 희생 제물로, 보속의 제물로 주님께 자신을 봉헌했습니다. 이때부터 루이사는 64년 조금 넘게 하느님의 뜻에 일치하고, 예수님의 수난에 합치하면서 침대에만 머물게 되었습니다.
 

의사들은 이 루이사의 고통의 원인을 전혀 설명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루이사가 속한 트라니 교구의 대주교님께서 루이사를 돌볼 수 있는 신부님을 임명했습니다. 그래서 그 신부님이 매일 아침 6시에 루이사의 방에서 미사를 봉헌하기 위해서 왔습니다. 이것은 교회 역사상 유일한 사건입니다.  우리가 죽을 때에나 사제가 와서 병자성사를 주고, 그것에 대해서 하느님께 감사드릴 수 있는 것이지, 루이사 같은 경우는 유례가 없는 일입니다. 60년 동안, 사제가 매일 아침 6시에 루이사의 방에서 미사를 드리기 위해 왔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또 사제가 60년 동안 올 수 있도록 주님께서 사제를 도와주시고 은총을 베풀어 주신 것도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사제도 주님의 도움을 받아서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나중에 주님께서 루이사에게 ‘사람들이 내가 왜 이런 은총을 너에게 주었는지를 도무지 이해 못할 것’이라고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내 거룩한 뜻을 사람들이 완전히 이해해서 하느님의 뜻을 깊이 이해한 다음에야 왜 내가 이런 특별한 은총을 주었는지 그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께서 루이사에게 아주 특별한 은총을 주셨는데, 루이사가 하느님 뜻의 사명을 받았기 때문에 그렇게 해주신 것입니다.
 
 
(3) 루이사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일기로 쓰다
 
그 당시 루이사의 고해 신부님이었던 돈 제나로 드 제나로 신부님은 1899년 2월 28일에 루이사에게 예수님과 루이사 사이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순명으로 다 적으라고 명령을 했습니다. 루이사는 1938년 12월 28일에 이 작업을 마쳤습니다. 거의 40년 동안 쓴 것입니다. 거의 매일 쓴 루이사의 일기는 거의 10,000페이지나 됩니다. 루이사가 받은 교육은 초등학교 1~2학년 밖에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루이사는 자기의 삶, 특별히 자기의 내적 삶이 완전히 숨겨져 있기를 원했습니다만, 순명으로 이런 일기를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루이사에게는 아주 훌륭한 고해 신부님과 자기가 쓴 글의 검열관 같은 분이 계셨는데 그분이 바로 성 안니발레 마리아 디 프란치아 신부님(그 당시 교회 출판물 검열 책임자였음. 2004년 5월 16일 시성됨)이십니다. 루이사와 성 안니발레 신부님과의 관계는 1910년에 시작해서 신부님께서 돌아가신 1927년에 끝났습니다.
 
성 안니발레 신부님은 자신이 루이사의 첫 번째 19권에 대해서 닐 롭스타를 주고, 또 이태리 트라니의 대주교님으로부터 인프리마트를 1926년에 받아내었습니다. 주님께서 루이사 안에 하신 일들은 분명히 이 지상에 하느님 나라가 오는 데에 말할 수 없이 초월적인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성 안니발레 신부님께서는 분명히 이해하셨습니다.
 
 
(4) 루이사의 삶
 
루이사 피카레타는 살아있는 동안에도 성인이라는 이름을 받을 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실제로 루이사 성녀라고 불렀고 지금도 그렇게 부르는데, 사람들이 루이사 안에서 단순성, 투명성, 거룩함을 보고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루이사는 청빈함 속에서 아주 지속적인 기도의 상태로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매일의 생활에서 아주 특별한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첫째로 그녀는 거의 안 먹는다고 할 만큼 조금밖에 먹지 않고 살았는데도 건강에는 아무런 문제나 피해가 없었습니다. 두 번째로 밤에는 몸이 딱딱해졌는데 루이사는 자기 몸이 딱딱해지는 것을 나의 일상적인 상태라고 했습니다. 루이사는 매일 아침에 신부님께서 미사를 드리고 영성체를 해주시기 위해서 오실 때, 신부님의 명령에 대한 순명으로 이 딱딱한 상태에서부터 풀려났습니다. 낮의 나머지 시간 동안에는 기도를 하거나 일을 하거나, 또 어떤 날은 루이사에게 자문을 구하러, 또는 루이사에게서 위로를 받으려고 찾아오는 사람들을 만나주며 그렇게 시간을 보냈습니다.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루이사는 정상적인 삶의 모범을 보여주었습니다. 매일 일상의 일을 하면서, 항상 거룩한 상태를 유지하면서, 겸손한 생활을 하고 단순한 생활을 하는 아주 정상적인 삶의 모범을 보여 주었습니다. 루이사의 생활은 주로 하느님의 뜻 안에서 일하고 사는 그런 것에 중점을 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 뜻의 작은 딸로서 루이사의 삶은 이 지상에 하느님 뜻의 나라가 오시게 하는 일에 모두 봉헌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주님의 기도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것처럼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소서.’ 라는 빛 안에서 하느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오는 것을 위해서 자기의 모든 삶을 봉헌한 것입니다. 이렇게 사는 것의 열매는 루이사의 덕행이 영웅적으로, 지속적으로 계속되었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루이사가 당해야 했던 시험을 통해서 루이사의 그 덕행이 영웅적으로 실천되었습니다. 그리고 루이사가 사는 동안에는 자주 교회의 권위자들, 교회의 어른들이 방문하기도 하고, 시험도 해보고, 검사도 하고, 관찰도 하고, 질문도 했습니다. 그리고 장상들도, 신부님들도 그리고 아주 극기생활을 하는 그런 사람들과 또 신학자들도 루이사를 방문했습니다. 이런 검사와 방문과 질문을 받으면서도 그녀는 침착하고 완벽하게 잘 견디어 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교회나 자기를 돌보는 사제들로부터 명백하게 드러나는 하느님의 뜻에 완전히 겸손하게 순명하셨습니다. 이것이 루이사의 특징이었습니다.
 
루이사는 하느님의 뜻 안의 지식과 사랑과 삶을 추진하고 증진시켰습니다. 인간적인 지혜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그녀의 관심과 하느님 사랑에 대한 아주 큰 그녀의 사랑의 열매로 그렇게 했습니다.  루이사는 삶을 굉장히 열정적으로 살았고, 사람들 안에서, 초등학교 교육밖에 못 받은 겸손하고 비천한 여인으로서,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진 사람으로서 그렇게 살았습니다. 루이사는 항상 거룩한 교회에 순명했습니다. 교회 장상들의 뜻에 완전히 순명하고 의탁하는 것이 예수님과 하느님의 뜻 안에서의 그녀의 사랑과 희망과 신앙을 드러내 줍니다. 교구 수준에서의 시복 조사 과정이 끝났을 때, 그 결론으로서 시복 청원자가 말한 대로 하느님의 종이 구원적인 고통의 사도였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루이사는 전혀 불평을 하지 않았습니다. 루이사는 희생 제물이신 그리스도와 일치해서 사람들을 위해서 하느님의 정의를 누그러트리고, 오직 죄를 보속하는 그런 희생 제물이었습니다. 우리도 그녀가 했던 것처럼 이 세상의 구원에 협조하기 위해서 고통의 작은 방울이라고 할까, 그런 것을 보태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소서.’ 라는 사명을 맡기기 위해서 선택하신 하느님 뜻의 작은 딸 루이사는 1947년 3월 4일에 선종했습니다. 우리 시대에 와서 시성성은 1994년 3월 28일에 루이사의 시복 과정을 시작할 수 있도록 닐 롭스타(오류가 없음)를 내려줬습니다.
 
 
(5) 루이사의 사명  
 
인류의 역사를 보면, 하느님께서는 모든 인류 가족을 위해서 특별한 사명을 맡길 사람들을 부르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인류의 역사 안에 하느님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많습니다. 루이사의 영적 일기를 보면, 루이사도 예수님으로부터 전 인류를 위해서 사명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루이사가 받은 사명은 주로 두 가지 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사명은 희생 제물로서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죄인들의 회개를 위해서 보속과 사랑의 희생 제물로서 사는 것, 그리고 예수님의 성심을 위해서 보속하는 것이었습니다. 루이사가 이런 상태로 살 수 있었던 것은 루이사 자신이 그렇게 살기로 동의했고 고해 신부님이신 미켈레 데 베네딕티스 신부님의 허락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두번째 사명은 하느님 나라의 도래와 하느님 뜻 안에서 사는 것이었습니다.
루이사의 이 둘째 사명은 첫째 사명으로부터 이루어지는 것으로서 첫째 사명을 수행했기 때문에 둘째 사명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루이사의 삶은 한쪽은 희생 제물의 삶이고, 다른 한쪽은 하느님 뜻 안에서 살면서 하느님 나라가 오게 하는 것인데, 이 둘은 하나로 합쳐져서 예수님의 인성 안에서 서로 이루어지고 또 예수님의 신성 안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교회의 역사가 가르쳐 주는 대로 예수님의 인성과 합쳐지지 않고서는 예수님의 신성으로 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하느님 아버지께로 갈 수 없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인성을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신성으로 갈 수가 없습니다.루이사는 자신의 영혼을 희생 제물로 바침으로써 단계적으로 하느님의 뜻 안으로 흡수되어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하느님의 뜻 안에 완전히 합치되었습니다.
 
처음에 예수님께서 루이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고통을 받는 것이 너의 양식이 되기 바란다. 그것도 단순한 고통이 아니라 내 뜻의 산물(産物)인 고통 말이다. 우리의 우정을 더욱 돈독히 하는 가장 신실한 입맞춤은 우리 뜻의 결합이요, 끊임없는 포옹으로 우리를 묶는 풀리지 않는 매듭은 부단한 고통이다.” (제3권 46장 2절 1900년 3월 2일 일기)  그녀의 삶의 신비적인 차원, 그러니까 예수님의 수난에 신비적으로 참여하는 그녀의 삶의 차원은 언제나 예수님 수난의 지속적인 묵상을 통해서, 묵상과 동반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루이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딸아, 네가 내 ‘수난의 시간들’을 반복하는 것을 보면서 느끼는 내 기쁨이 얼마나 큰지 네가 알면 참 좋겠다. 게다가 너도 늘 이 기도를 반복하다 보면 기쁨을 느끼게 될 것이다. 사실, 내 성인들은 내 수난을 묵상하면서 내가 얼마나 극심한 고난을 받았는지를 깨달았고, 너무나 측은해서 울음을 터뜨리기도 하였으며, 내 고통에 대한 사랑으로 온몸이 불타는 듯한 체험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이 기도처럼 순서에 따라 지속적으로 반복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너야말로 내 생애와 내가 겪은 것의 편린(片鱗)들을 시시각각 너 자신 안에 보존함으로써 이리도 크고 특별한 기쁨을 내게 주는 첫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 너에게 나는 매우 강하게 끌림을 느끼기에 시시각각 그것을 음식으로 주고, 같은 음식을 너와 함께 먹으며, 네가 하는 일을 함께 한다.” (제11권 81장 2절-5절 1914년 11월 4일)
 

예수님의 수난에서 예수님의 충실한 동반자였지만 루이사가 예수님의 고통에 참여하지 못할 때가 한 번 있었습니다.
그때 루이사가 예수님께 물어봅니다. “도대체 내가 무엇 때문에 사는가? 고통에도 참여하지 못하는데 왜 사는가?”

예수님께서 루이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딸아, 네가 누구인지 알고 싶으냐? 너는 ‘감실 수난의 루이사’다. 내가 내 고통을 너와 나눌 때에는 네가 아직 ‘해골산 수난의 루이사’이지만 그렇지 않을 때에는 ‘감실 수난의 루이사’라는 말이다.” (제8권 62장 1909년 1월 27일 일기) 
 
 나중에 또 예수님께서 루이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에게서 나무 십자가를 거두어 가는 대신 내 뜻의 십자가를 준다는 것을. 이 십자가는 길이도 너비도 없는, 무한한 십자가요, 내가 너에게 줄 수 있는 가장 고상한 십자가이다. 이는 나무가 아니라 빛으로 이루어진 십자가이다. 어떤 불보다도 더 세게 타오르는 이 빛 안에서, 각각의 피조물과 그들의 극심한 고통과 고뇌 안에서, 너와 나는 함께 고통을 받으면서 모두의 생명이 되도록 힘쓰기로 하자.”  (제11권95장12-13 1915년 6월 17일)
 

몇 달 후에 예수님께서 루이사에게 말씀하셨습니다.인류의 역사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많은 종류의 성덕을 시작하기 위해서 몇몇 사람들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예수님께서 그분 뜻의 삶을, 그분의 뜻 안에서 사는 성덕을 시작하기 위해서 루이사를 택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루이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딸아, 너는 나의 모든 말을 다 쓰지는 않았다. 나의 뜻에 대해 내가 들려주는 말은 무엇 하나 빠뜨리면 안 된다. 더없이 사소한 말도 나중 세대의 사람들에게 유익할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성덕들에는 저마다 그 고유의 성덕 유형을 맨 먼저 시작한 성인들이 있었다. 어떤 성인은 참회라는 성덕을, 어떤 성인은 순명이라는 성덕을, 또 다른 성인은 겸손이라는 성덕을 일으켰으며 다른 모든 성덕들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나는 네가 내 뜻 안에서의 삶 성덕의 창시자가 되기 바란다.” (제12권 27장 3절-5절 1917년 11월 27일)
 
 
며칠 후 예수님께서 루이사에게 왜 예수님께서 루이사에게 피앗(Yes)을 요구하셨는지, 그리고 이 피앗이 어떻게 예수님의 영원한 행위의 초점과 영원히 지속되는 예수님의 뜻과 계속 연결이 되는지를 설명하셨습니다. 지금 하느님의 뜻 Will 하고, Volition 둘이 있는데 이것을 한국말로 어떻게 번역하는가에 대해서 잠깐 이야기하고 계속하겠습니다. 이태리어나 스페인어처럼 ‘뜻’ 자체와, ‘볼레레’하면 원한다는 동사의 뜻이 들어갑니다. ‘뜻’ 은 명사이고, ‘볼레레’ 는 동명사 같은 것이지요. 영어에는  ‘볼레레’ 같은 단어가 없어서 ‘볼리션’ 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즉 Will과 Volition 두 가지 단어를 쓰고 있는데, 한국말에는 이런 구분이 없으므로 루이사의 글에서 Will과 Volition은 그냥 같은 의미로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문답식 영광의 책의 94항 문: 하느님의 Will과  Volition은 어떻게 다릅니까?
답: 이를 설명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루이사 피카레타의 “천상의 책”에서는그 전체에 걸쳐서 'Volonta' 대신에 'Volere'라는 용어가 종종 사용되고 있습니다만, 두 용어의 차이를 더 쉽게 구분하게 하는 쪽은 영어보다도 이탈리아어인 듯합니다.
(Volonta는 Will로, 동사로도 쓰이는 Volere는 Volition으로 영역되어 있습니다. - 역주)
 

이 책의 주제들과 관련이 있으므로 Will과 Volition의 구분에 도움이 되도록 하나의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심장을 Will과 유사한 것으로, 심장박동을 Volition으로 생각해봅시다. Will에서 발생하는 wish를 Volition이라고 보면 유익할 것입니다. 말하자면, Will은 주된 본질 자체로, Volition은 이 본질의 주된 현동(現動)으로 간주될 수 있으리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구분을 하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로 보이지만, 그래도 이 구분이 진지한 영혼을 도와, 하느님의 뜻이라는 위대한 선물을 조금씩 더 완전히 이해하게 해 줄 것입니다. 」
 
“이제 너의 ‘피앗’을 ― 내 뜻 안에서 발해지는 너의 ‘예’를 내가 청한 까닭을 말해 주겠다.
이는 내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Fiat Voluntas Tua sicut in coelo et in terra)라고 가르친 기도, 오랜 세기에 걸쳐 수많은 세대들이 바쳐 온 기도가 완전히 성취되게 하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나는 내 의지 안에 창조력을 지닌 또 하나의 ‘예’, 또 하나의 ‘피앗’이 있기를 원했다. 그것은 순간마다 일어나며 모든 사람 안에 증가하는 ‘피앗’이다. 그리하여 나 자신의 ‘피앗’이 한 영혼 안에서 나의 옥좌로 올라가고, 그 창조력에 의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의 생명을 땅에 가져오는 것이 나의 바람인 것이다.” (제12권 148장 13-14 1921년 1월 17일)
 
이제 루이사의 글의 중요 주제로 들어가겠습니다.
루이사의 글에서 중요한 세 가지 부분들을 다루겠습니다.
 
 
(6) 예수님의 수난 / 하느님 뜻의 나라(하느님 뜻 안에서의 삶) / 인간적인 뜻과 하느님 뜻의 관계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 두 번째로 하느님의 세 번째 피앗인 하느님 뜻의 나라,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하느님 뜻 안에서의 삶, 그리고 세 번째로는, 이것은 루이사의 글에 자주 나오는 주제라고 할 수 있는 인간적인 뜻과 하느님 뜻의 관계입니다. 아시다시피 루이사의 삶에서 수난은 아주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루이사는 아주 어릴 때부터 벌써 수난을 묵상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루이사에게 수난을 어떻게 묵상하는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열일곱 살이 되었을 때 예수님께서 루이사가 수난의 각 부분에 참여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루이사는 일생 동안 예수님의 수난 안에 잠겨 있었습니다.
 
루이사는 처음에는 예수님 수난의 외적인 차원에 참여하기 시작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예수님 수난의 깊은 차원, 내적인 차원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루이사를 예수님으로 변화시켰습니다. 그리고 하느님 뜻의 선물을 받을 수 있도록 준비시켜 주었습니다. 루이사가 고통 받으시는 예수님의 인성 안에서 완전히 예수님으로 변화되었을 때 예수님께서 루이사를 당신 뜻의 신비 속으로 들어오게 인도해주셨습니다. 그것이 루이사의 사명의 둘째 차원이었습니다.  하느님 뜻 안에서의 삶, Fiat Voluntas Tua(당신 뜻이 이루어지소서)의 의미, 하느님께서 하신 모든 일의 면류관 그래서 루이사가 '하느님 뜻의 작은 딸'이라고 불리게 된 것, 이것이 루이사의 사명이었습니다.
 
이런 모든 일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께서 루이사를 도와주시고, 루이사가 받은 은총과 예수님의 가르침으로 루이사의 인간적인 의지, 뜻이 하느님의 뜻과 완전한 친교, 완전한 일치를 이루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류 역사 안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였으며 이것을 적을 때에는 항상 대문자로, 굵은 글자로 써야 하는 아주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인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하느님의 뜻과 인간 뜻 사이의 관계에서부터 생기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의 뜻과 인간의 뜻 사이에서 생기는 충돌, 이 문제가 인간 역사의 모든 문제의 원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라는 그 기도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기 시작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들어오실 때, ‘성부님, 제가 당신의 뜻을 행하러 여기 왔습니다.’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겟세마니에서의 예수님의 구원의 중심에는 ‘나의 뜻이 아니라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소서.’ 라고 하신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우리에게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하고 청했을 때,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라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가 바로 모든 것의 열쇠이고 모든 것의 핵심이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의 뜻과 하느님의 뜻이 하나가 되면 진정하고 완전한 사랑이 있게 되고, 하느님의 삶을 나누는 모든 문이 열릴 것이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고 하는 모든 선을 우리가 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 때 하느님 성부께 청한 완전한 일치(요한 7,21-22 참조)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루이사의 글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입니다. ‘하느님 뜻의 나라 동정 마리아’에서도 이것이 가장 중요한 주제입니다.
 
이 두 뜻 사이의 관계, 하느님의 뜻과 우리 뜻 사이의 관계입니다.
지금 우리가 이 피정 동안에 순례를 하고 있습니다만, 수난 묵상을 통해서 예수님과 하느님의 신비와 두 뜻의, 하느님의 뜻과 우리 뜻 사이의 관계를 묵상하는 것입니다. 이 피정의 마지막 목표는 하느님 뜻 안에 사는 것이기 때문에 이 피정은 거기로 가는 순례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 뜻 안에서 창조되었으나, 탕자의 비유에서처럼, 그들은 자기의 뜻대로 하려고 아버지의 집을 떠나버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모든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게로 돌아가는 역사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시어 우리를 다 껴안으시고, 우리를 자유롭게하시고,정화시키시고, 당신 자신으로 우리를 입히시고, 우리를 다시 하느님의 집으로 인도해 가기 위해서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것은 세말(世末)에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집으로 인도해 들어가는 것은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 역사 안에서 세 번째 피앗의 시기는 인류가 하느님 뜻의 나라로 다시 들어가는 그 과정의 시작인 이 시대이고, 지금 이 세상에서의 하느님 나라가 하늘나라의 왕국처럼 되는 시기입니다. 우리는 우리 능력으로는 하느님 아버지의 집(나라)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오로지 예수님을 통해서, 예수님에 의해서, 예수님 안에서만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나라로 들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며칠 동안에 우리가 해야 할 것이 바로 이런 주제이고 순례입니다.  하느님의 집으로 되돌아 들어가는 것입니다.  살아계시고 우리를 다스리시는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영원토록 찬미와 영광과 흠숭을 받으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