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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님의 눈물을 닦아 주신 부활하신 예수님 
 류해욱 신부 - 예수회

 

 

우리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축하드리며 부활의 기쁨을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사순시기에 기도와 보속의 생활을 하시면서 열심히 사신 그만큼 부활의 기쁨도 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부활 시기에 부활의 기쁨을 어떻게 느끼며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에 대해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부활에 대한 기도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커다란 기쁨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지만 우리가 부활을 기도하면서 마음에 두어야 할 것은 ‘예수님의 부활이 아주 조용한 사건이었다’ 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활에 대해 다른 기대를 가지고 있다면 예수님께서는 왜 그렇게 조용히 다가오시는가? 라고 묻고 싶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성서의 말씀을 들어 ‘나의 길은 너의 길과 같지 않다’ 고 하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에게 아주 가까운 사람들에게 조용히 나타나셨습니다. 부활은 당신의 탄생이 그렇듯이 아주 조용한 사건이었고 그 이미지는 마치 옹달샘과 같습니다. 깊은 산 속의 옹달샘에 물이 고이면 소리없이 조금씩 흘러내려서 촉촉이 적셔 주듯이 그렇게 우리에게 다가오는 어떤 것입니다. 그 옹달샘에서 처음에 흘러나오는 물은 무엇이겠습니까?

 

평화입니다.! 조용한 사건의 첫 열매는 평화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나타나시면서 많은 말씀을 하지 않으셨고 당신이 사랑하던 사람들과 나누고자 하신 것은  바로 평화였습니다.  부활이 커다란 기쁨임에는 틀림없지만 부활에 대한 기도를 하면서 ‘알렐루야’부터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조용히 기다리고 무엇을 느끼고 난 다음에 조금씩 조금씩 그 평화가 기쁨으로 변화되도록 하여아 할 것입니다. 성 이냐시오는 그의 ‘영신수련’에서 부활에 대한 기도를 할 때, 예수님께서 발현하셔서 처음에 하신 것은 그의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로해 주셨다는 것을 염두에 두라고 알려 줍니다.

 

성 이냐시오는 부활에 대한 기도의 첫 번째 기도로 ‘예수님께서 성모님께 나타나심’을 관상하도록 초대합니다. 성서에는 그 내용이 없지만 그것은 너무나 당연하여 기록할 필요조차 없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가장 사랑하시는 분이신 당신 어머니 성모님께 나타나셔서 그분을 위로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부활하신 것보다도 드디어 이제 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린 것이 더 기쁘셨을 것입니다. 본의는 아니었지만 이제까지 늘 아픔을 드렸는데 이제 부활하셔서 다시 어머니께 나타나심으로서 어머니의 눈물을 닦아드릴 수 있는 것이 기쁘시고 감동이셨을 것입니다.

 

성서가 우리에게 전해 주고 있어 잘 아시다시피 주님께서는 막달라 여자 마리아에게 위로를 주셨고 당신 제자들에게, 특히 베드로에게 ‘나를 사랑하느냐’ 는 물음을 통해서 위로를 주십니다. 세 번 배반하였던 아픔을 위로해 주시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위로해 주시는 것 이외에 무엇을 하셨는가? 우선 사랑하던 사람들인 그들을 확신시키시는 것이었습니다. 당신이 참으로 부활하셨다는 것을 확신시키시려고 하셨습니다. 그분의 부활의 메시지를 전하는 사도가 되기 위한 필수 조건이 바로 당신이 부활하셨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40일 동안 지상에 머무시면서 제자들에게 이것을 확신시키셨습니다.

 

성모님께서도 여러 곳에 발현하셨고 특히, 메주고리예에서 지속적으로 발현하고 계시는데 발현하셔서 전하시고자 하는 메시지의 핵심이 평화라는 것과 또한 그것들이 모두 조용한 사건이었다는 것과 성모님께서도 발현하셔서 하신 일이 사람들을 위로해 주셨고 그 발현에 대한 확신을 주시고자 하신다는 것을 생각하면 성모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모범을 따르고 계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부활에 대한 기도를 하면서 중요한 것은 느낌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부활시기 동안 성서에 있는 한 사건, 한 사건을 따라 가면서 해도 되고, 그냥 부활의 그 조용한 분위기 안에서 성서에 머물러도 좋습니다.  어떤 방식으로 기도하든지 관상하는 그 마음 자세는 조용히,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냥 부활의 사건 안에 들어가서 기다리다 보면 어떤 느낌이 올 것입니다. 그 느낌에 머물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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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 구체적으로 부활에 대한 기도에 도움을 드리기 위해서 제가 부활 대축일에 들은 요한 복음에 의한 부활 사건에 대한 대목으로 기도하면서 느꼈던 것을 중심으로 몇 가지 점을 나누겠습니다. 기도하기 위해 먼저 복음 말씀을 읽어야겠지요. 복음 말씀은 그냥 눈으로 읽지말고 마음으로, 가슴으로, 장면을 그리면서 느끼면서 읽어야, 그리고 성서 말씀 행간의 언어들을 음미해야, 그 의미를 바르게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고자 하는 성서 대목,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무덤을 찾아가는 사건 앞에 앉아서 머물면서 어떤 느낌이 오는지 보고 그냥 그 느낌에 따라갑니다.

 

부활 대축일 아침 복음에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막달라 여자 마리아는 우리에게 흔히 죄많은 여자, 예수님께 용서받은 죄 많은 여인으로 알려져 있지요. 그렇습니다. 예수님께 지극한 사랑을 베풀었던 여인, 예수님 발치에 앉아 향유를 부어 드리고 눈물로 발을 씻어 드리던 여인이지요. 비록 한때 죄를 많이 지었었지만 이 세상에서 누구보다 더 예수님을 사랑했던 여인이지요. 복음에 나타난 여인의 행동에서도 그 여인이 얼마나 예수님을 사랑했었는가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 여인을 예수께서는 말없이 받아 주셨고 이제 부활하셔서 성서 안에서는 가장 먼저 그 여인에게 발현하신 것입니다.

 

사랑은 거짓이 없습니다. 사랑한 그만큼 사랑은 되돌아옵니다. 다만 어떤 대가를 바라지 않을 때 그렇습니다. 기실 대가를 바란다면 그것은 이미 사랑이 아니겠지요. 당시 유대인들은 사랑하는 사람을 무덤에 묻은 후 사흘동안을 사랑하던 사람이 그 무덤을 찾아가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우리의 문화와 관습과 별로 다를 것이 없지요. 우리 풍습에 죽은 혼이 떠돈다고 진혼제 등을 하는 것과 비슷한 것이지요. 유대인들도 죽은 혼령이 사흘 동안을 무덤 주변을 떠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래서 사랑하던 사람이 그 혼을 위로하기 위해 사흘 동안 무덤을 찾아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묻은 다음날이 마침 안식일이었지요. 유대인들에게 안식일은 거의 절대적이었지요. 안식일에는 절대로 무덤을 찾아가는 일은 금기되어 있었지요.

 

예수님을 극진히 사랑했던 막달라 여자 마리아의 마음을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이 묻힌 무덤에 얼마나 달려가고 싶었겠습니까?  하여, 안식일 다음날 이른 새벽, 아직 어두울 때 그 여인은 무덤을 향해 달려갔던 것입니다. 그 마음을 느끼며 우리도 그와 같은 마음이 되어 보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무덤은 산의 한쪽 옆을 석굴처럼 파고 입구는 커다란 돌로 막아 놓았는데 겨우 들여다 볼 수 있을 만큼 조금 열어놓았다고 합니다. 조그만 틈으로나마 들여다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무덤에 갔던 막달라 여자 마리아는 깜짝 놀랍니다. 커다란 돌이 휑그러니 치워져 있었던 것입니다. 여인은 달음질하여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상황을 알립니다.

 

 “누군가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갔습니다. 어디에다 모셨는지 모르겠어요.”라고. 여인은 놀랍고 두려워 어쩔 줄을 몰라하면서도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에게 달려갑니다. 예수님을 세 번 모른다고 부인했던 베드로이지만 여전히 제자들의 맏형 격이었던 베드로는 마리아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 요한은 그 말을 듣고 무덤을 향해 달려갑니다. 그들이 달려가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젊은이였던 요한이 먼저 무덤에 다다랐지만 베드로가 당도하기를 기다려 함께 무덤 안으로 들어갔지요. 윗사람에 대한 배려, 마음씀이 돋보입니다.

 

공동 번역을 보면 그들이 무덤 안에 들어가 수의가 흩어져 있는 것을 보았는데 예수의 머리를 싸맸던 수건은 수의와 함께 흩어져 있지 않고 따로 한 곳에 잘 개켜져 있었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흩어져 있었다” 라는 표현은 없는 말이 첨가된 오역이지요. 그냥 “놓여져 있었고 수건은 따로 잘 개어져 있었다” 라고 해야 옳은 번역입니다. 여러 영어 번역 본들은 대게 옳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He saw the linen clothes lying there..., not lying with the rest of the linen clothes, but lying apart from them..." 굳이 그 차이를 지적하는 것은 ”흩어져 있었다“ 라고 하면 함부로 아무렇게나 버려진 것으로 오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 요한은 수의들이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잘 놓여 있고, 특히 머리를 감쌌던 수건은 따로 잘 개어져 있는 것을 보고 놀라면서 어떤 깨달음을 얻은 것입니다. 그 장면을 목격한 요한은 시체가 함부로 옮겨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본 것입니다. 그 순간 그는 주님께서 죽었다가 반드시 살아나시리라는 당신의 예고와 성서 말씀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때까지는 성서의 말씀이나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예고하셨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는데 자기의 눈으로 무덤에서 일어난 일을 보고서야 갑자기 깨달은 것입니다. 깨달음은 이렇게 문득 우리에게 찾아옵니다. 요한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을 깨닫고 느꼈을 그 느낌, 그 감동, 그 기쁨이 우리에게도 느껴지도록 청하면서 머무는 것입니다.

 

이 대목을 관상하면서 제가 느끼고 새삼스레 깨닫게 되는 것은 사랑이란 참으로 놀랍고 엄청난 힘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극진히 사랑했던 막달라 마리아가 먼저 무덤에 달려갔었고,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 요한이 무덤에 수의와 수건이 놓여 있는 것을 보고 가장 먼저 예수님의 부활을 믿게 됩니다. 사랑이 그로 하여금 상황을 깨닫고, 알아듣고, 믿도록 한 것입니다. 예수님과 요한이 서로 나누고 있던 사랑의 마음, 그것이 모든 것을 분명하게 볼 수 있도록 이끈 것입니다.

 

막달라 여자 마리아는 주님이 없어졌다는 그 슬픔으로 가득 차있었기 때문에 무덤에 들어가 볼 엄두도 못 내고 밖에서 울고 있었지요. 그 때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여인이여, 왜 울고 있는가?” 라고 묻습니다. 슬퍼하는 마리아를 향한 예수님의 연민의 마음이 그대로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당신을 극진히 사랑했던 여인 마리아에게 처음 나타나셨다는 것이 우리의 가슴을 촉촉이 적셔줍니다. 사랑하는 그만큼 사랑받은 것입니다. 참으로 사랑할 때 사랑은 소리없이 우리에게 다가온다는 것을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만히 들려주고 계신다는 것을 기도 안에서 깊이 알아듣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부활을 관상하면서 우리도 주님께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지녔던 사랑을 지니도록 청해야겠습니다.

 

다시 한번 부활을 축하드리며 부활에 대한 기도를 통해서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가슴으로 느끼며 거기서부터 스며 나온 기쁨이 우리의 일상 삶 안에서 이웃에게 전해지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 2001년 4월. 평화의 모후 선교회  발행  '메주고리예' 소식지 제4 목자의 소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