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제손을 잡아 주소서!

우리의 구원인 성체와 우리의 도움인 성모 마리아

 

박효철 신부

 

모든 동물에게는 귀소본능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여우도 죽을때는 자기 동굴을 향해 머리를 둔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다급하면 먼저 엄마를 찾습니다. 어린 학생들이 학교에서 집에 돌아와 제일 먼저 찾아 부르는 이름도 엄마입니다. 병아리가 암탉의 품을 본능적을 찾듯이 말입니다. 왜 그럴까요? 엄마 어머니는 우리들의 몸과 마음의 본향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본능적으로 아이의 목소리를 알아듣습니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아무리 많은 사람들과 섞이어 있고 시끄러운 소음 속에서도 자기 아이의 울음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여인은 가냘프나 어머니는 위대하다고 합니다.

 

 

“이 분이 네 어머니 시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때부터 그 제자는 마리아를 자기 집에 모셨다. - 요한 19,27 -

하느님께서 마리아를 우리들의 어머니요, 나의 어머니로 짝지어 주셨습니다. 하느님의 어머니시며 천상의 모후이신 분을 나의 어머니로 주셨습니다. 그런데 몇 년 전 어느날 제 사제생활을 문득 돌아보니, 언제부터인가 제 삶속에 성모님을 잊고 사는 저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어느날 갑자기(?) 삶이 무미건조해지기 시작했고 기도를 드려도 성사를 주례하고 미사를 집전하면서도 아무런 감흥도 없었으며, 도대체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는 무력감에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손끝 하나 까닥하기도 싫었고 매사에 의욕을 잃고 암흙 속을 헤메이고 있었습니다.  자연 사제로서의 삶이 실증이 났고 거기서 벗어나고자 발버둥친다는 미명하에 취미 생활에만 몰두하게 되었고, 아무리 소리쳐도 응답도 없는 어둔 밤 속에서 술독에 빠져 괴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늪에 빠져 그 늪에서 벗어나려 허우적거릴수록 점점 더 늪에 빠져들게 되듯이 몸부림칠수록 악순환은 계속되었고, 끝간데 모를 어둠의 터널을 정처없이 걷고 있었습니다.

 

 

연말이 되어 유언장을 다시 써 가노라니 제 모습이 한없이 초라했고 죽고만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추수가 다 끝난 철지난 빈 들녘에서 비를 맞고 서있는 허수아비처럼 처량하고 외로운 느낌이었습니다. 한참을 눈물 콧물을 다 쏟아가며 울부짖다가 이 문제가 어디로부터 왔으며 어디에서 시작되었나를 곰곰이 성찰하게 되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제 손에서 묵자가 떨어져 나가 있었으며 제 삶의 중심에 어머니이신 성모님을 모시지 않고 있었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를 모시지 않고 있으니 자연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애정도 식어 갔었고 그나마 습관적으로라도 읊고 있던 성무일도서도 어디로 간지 오래였습니다.

 

 

빈 껍데기만 남아 인간적인 잔재주만 믿고 하느님보다는 나를 더 앞세우려는 어릿광대와도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기를 좋아하고 칭찬받고 사랑받기 위해 “예”와 “아니오”를 분명하게 구별 못하고, 우유부단하게 게으름으로 적당하게 현실에 안주하며 살고있는 제 모습을 발견하고는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새해, 첫날 첫 시간을 “하느님의 어머니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을 통해 제 일생을 새롭게 봉헌하면서 어머님을 간절히 부르며 그 품에 저를 의탁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 제 손 잡아주소서’라고 물에 빠진 사람의 간절한 심정으로 손을 내밀었습니다. 새로운 희망과 결심으로 성모님을 나의 어머니로 “제 짐”에 “제 삶”의 중심을 모시고 새로운 출발을 시작했습니다. 좋아하던(?) 술을 끊어 버리겠다는 결심을 어머니를 통해 봉헌했고 절제된 삶을 살아가기로 다짐을 새롭게 했습니다. 작심삼일이 되지 않기 위해 ‘삼일작심’의 봉헌의 표시로 갈색 스카플라와 기적의 패 그리고 저의 주보성인이신 분도 성인의 패를 다시 목에 걸며 ‘세속과 육신과 마귀’와의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쉽지는 않았지만 차츰 생활이 안정되어 가고 새로운 희망이 보이기 시작할 무렵 저에게는 참으로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지난 번 주임신부로 있던 본당에서 본당 설정 1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성모상을 성당 앞마당에 바위로 단을 쌓아 우리들의 친근한 어머니로 옮겨 모셨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꽝! 하고 지축이 울리는 소리에 깜짝 놀라 뛰어 나가보니 어처구니 없고 믿기 어려운 일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성모상은 온데 간데 없고 왠 승용차가 그 위에 올라앉아 있었습니다. 어이가 없어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는데 그 차 속에서 자매님 두 분이 얼굴이 백짓장처럼 하얗게 되어 기어 나왔습니다.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으니 본인들도 잘 모르겠답니다. 분명히 차를 후진 시켰는데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고개를 갸우뚱 거릴 뿐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일은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질 않았습니다. 일부러 가속 페달을 밟아도 승용차가 후진하여 바위를 타고 올라가 그 위의 성모상을 무너뜨리고 올라 앉을 수는 없는 일이고, 만일 그 차가 90도로 꺾이지 않고 직접 후진이 되었다면 그 뒤의 집을 덮쳐 크게 다쳤을 텐데.......

 


뒤를 돌아 가보니 성모상은 산산이 부서져 있었습니다. 순간 나도 모르게 무엇으로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듯한 진한 아픔과 깨달음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아! 바로 이것이었구나! 성모님께서 나의 어머님께서 이렇게 자신의 몸을 온몸이 부셔지고 가루되어 피범벅이 되시어 이 못난 나를 지켜주셨구나. 내가 길을 잃고 방황할 때 외로움과 괴로움으로 몸부림칠 때 어머니께서는 피눈물로 온 몸을 바쳐 나를 보호해 주셨고, 그 자애로운 망토 자락으로 나를 감싸주고 계셨구나. 오, 어머니 마리아님!" 어머니께서는 울부짖는 아이의 음성을 제일 먼저 들어 주셨습니다. 주체할 수 없는 감동으로 성당으로 뛰어 들어가 감실앞에 엎드려 한참을 목놓아 울고있는데 뒤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몇몇 할머니들과 수녀님이 함께 울고 계셨습니다.

 

 

저는 결코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내가 몸부림치고 괴로워하고 있을 때 누군가가 함께 간절히 기도와 희생을 바쳐주고 있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서 있는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먼저 어머니에게 “어머니,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하시고 그 제자에게는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하고 말씀하셨다. 이때부터 그 제자는 마리아를 자기 집에 모셨다. - 요한 19, 26~27 -

그 후로 성모님을 나의 참 어머니로 제 마음의 집에 새롭게 모시고, 성모신심과 성체신심의 중요성을 전파하며 성실히 봉헌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돈보스코 성인께서는 일찍이 환시를 통해 “우리의 구원인 성체”와 “우리의 도움인 성모 마리아”라는 두 기둥으로 교회가 완전하고 안전하게 목적지에 닿을 수 있다고 예견하셨습니다. 우리들에겐 그 어느 때보다 더 성모신심과 성체신심이 요구된다고 생각합니다. 기도를 통해 저도 메주고리예를 순례할 수 있도록 불러 달라고 부탁드렸더니 갑자기 네 차례나 불러 주시어 은혜로운 여정을 함께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모님을 통한 하느님의 뜻이 어디 있는가를 헤아려 그분들의 뜻을 이루려는 구체적인 삶의 실천일 것입니다. 여러 만남과 관계를 통해 부르시는 그분의 음성을 귀담아 듣고 메시지에 따라 살아가기로 끊임없이 결심하는 삶이 중요합니다. ‘앎’이 ‘함’으로 실행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오늘 나는, 내 평화의 메시지를 들은 너희 모두가 진지하게 사랑을 지니고, 그 메시지를 너희 삶에서 실천하도록 초대한다. 메시지에 대해 이야기함으로써 많은 일을 한다고 착각하며, 메시지대로 살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나는 너희가 생명을 얻게 되도록 초대한다. 너희 안에 있는 부정적인 것을 모두 긍정적인 것으로 변화시켜, 생명을 얻도록 초대한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나는 너희와 함께 있다. 너희 각자가 복음 말씀대로 살면서 너희 삶으로 복음을 증거하게 도와주고 싶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나는 너희를 도와주어 천국으로 인도하려고 이곳에 와 있다. 천국에서 누리는 기쁨을 맛봄으로써, 너희는 지금 벌써 천국을 살 수 있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 1991년 5월 메주고리예 성모님의 메시지).

 

 

( 2001년 6월 평화의 모후 선교회 발행 '메주고리예' 소식지 제 6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