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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 한인 가톨릭의  초석을  마련해주신 “반석이며 기둥”이시고  

"평화의 모후 선교회" 지도신부님이신 박창득 어거스틴 몬시뇰님께서 선종하셨습니다. 

" 박몬시뇰님은  저희들에게 아낌없이 주는 나무이셨습니다. 신부님,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

 


미주 한인 천주교회의  초석을 마련해주시고  2004년부터  10여년 동안 평화의 모후 선교회 지도신부님이시며 저희들에게 큰 기둥이 되어 주셨던, 
박 창득 어거스틴  몬시뇰님께서 9월 18일(금) 오후 4시 44분에 선종하셨습니다. 몬시뇰님의 영원한 안식을 위해 간절한 기도 부탁드립니다.
 박창득  어거스틴  몬시뇰님의 뷰잉 및 장례미사 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장       소 : 280 Parker Ave., Maplewood, NJ 07040 (메이플우드 한인천주교회,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뷰       잉 : 9월 23일(수) 오후 6시– 9시 30분  ( 8시부터는 묵주기도 및 연도시작 )
장례미사 : 9월 24일 (목) 10시  (오전 9시~10시까지 - 뷰잉 )
장       지 :  Franklin Lake에 있는 Christ the King Cemetery


몬시뇰님과 요한 바오로2세 교황님.jpg


미주 한인 가톨릭의 “반석”  박창득 어거스틴 몬시뇰 

박창득(朴昌得) 어거스틴 몬시뇰의 40년간의 미국 내 사목활동을 알고 있는 신자들 중에는 그를 미국 한인 가톨릭계의 아브라함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또 박몬시뇰에 대해 알고 있는 내용의 깊이에 따라 미동부 한인 가톨릭의 주춧돌 역할을 했다는 의미에서 베드로 (반석)이라고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선교와 공동체의 확장, 신심운동에 주력했다는 의미에서 바오로 (반석) 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미동북부 지역의 한인 가톨릭계 역사는 바로 박창득 몬시뇰의 역사이고, 박몬시뇰은 한인 가톨릭계의 역사 자체이기도 하다. 

박창득 몬시뇰은 뉴저지 한인 천주교회(종전 오랜지 성당, 현 메이플우드 성당)를 시작으로 현재 뉴저지의 거의 모든 한인상당을 공소 형식으로 직접 창립하거나 창립에 관여했고, 성령운동, ME, 청소년 안티옥 프로그램 등 신심운동을 처음으로 한인가톨릭에 도입했다. 조민현 요셉, 박홍식 돈 보스코, 김정수 디다고, 이경 바오로, 조후연 야고보 신부의 아버지 신부로서 한인 성당을 뉴왁교구의 성소못자리로 만든 새벽의 농부이며 , 북미주 한인 사목 사제협의회를 만들어 12년 동안 회장직을 수행하며 미 전국 한인 가톨릭의 텃밭을 다졌고, 가톨릭 다이제스트. 매일미사. 평화신문 등을 창간하여 신자들의 영성 향상을 이끈 신앙의 아버지이다. 또 중국은 물론 북한을 30여 차례나 방문하며 선교에 헌신하고 있는 선교사이다. 



★ 6 25 고난 겪으며 성소 다져 

박창득 어거스틴 몬시뇰은 1935년 충북 청주에서 출생, 1961년 3월19일 가톨릭대학 신학부 졸업, 3월20일 대전교구에서 사제서품을 받았다.  박몬시뇰은 15세 때 서산중학교 3학년생으로 6 25전쟁을 맞았는데 천주교 신자라는 이유로 같은 학교 좌파학생들에게 죽기 직전까지 집단 폭행을 당했다. 당시 동네 전체가 인민군들이 수중에 들어가고 곳곳에서 인민재판이 벌어져 공개리에 총살이 집행되곤 했는데 인민군과 가까운 한 지인이 학생 박창득도 예수쟁이라는 죄목으로 처형 대상에 올라있는 서류를 보고 박창득 학생에게 귀뜸해주어 그 순간 동네를 탈출, 1시간 거리에 있는 청주시내 누님댁으로 피신했다. 누님댁은 집이 커 인민군이 숙소로 쓰고 있었기에 오히려 호랑이굴이 더 안전할 것이란 생각에서였다. 

박창득 학생은 누님댁 골방에 숨어 피신할 때 자신도 모르게 들고 온 준주성범을 읽고 읽고 또 읽고 했는데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 속에 다니지 아니한다는 요한복음 8장의 말씀과 세상일은 모든 것이 헛되다는 말씀에 사로잡혔다. 학생 박창득은 이 어려운 상황에서 죽지 않고 살아 남는다면 하느님께서 특별한 은혜를 주시는 것이니 남은 생명은 하느님께 봉헌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전쟁 전에 어머님께서는 "너는 신학교에 갔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자주 하시곤 했다.  전쟁이 끝나자 학생 박창득은 어머님의 기도 속에 신학교에 들어갔다. 당시 신학교 교장선생님은 73년 뉴욕 퀸즈에 한인 성당을 세워 박창득 신부와 함께 미동부 한인 가톨릭의 양대 기둥 역할을 하신 정욱진 토마스 신부였다. 


★ 72년 뉴저지 한인성당 설립 

박창득 신부는 1961년 사제서품 후 대전 대흥동 성당의 보좌신부로 사목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대흥동 성당의 주임은 오기선 신부, 박신부와 함께 보좌신부로 사목하던 신부는 두봉 주교님(은퇴)이다.  박신부는 군종신부를 거친 후 1966년 프랑스 파리와 이탈리아 로마로 유학, 67년 이탈리아 안젤리꿈 대학에서 종교사회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 후 뉴욕 뉴스쿨에서 사회학 공부를 더 하기 위해 도미, 펜실베니아주 포코노에 있는 St. Mary 성당 보좌, 뉴저지 저지시티의 Our Lady of Victories 성당의 보좌신부로 사목하면서 공부를 계속했다. 당시 미동부에서는 1967년 베네딕도 수도회 소속 장흔 코르넬리오 신부(콜롬비아 대학교 동양미술사 교수 한국 제2공화국 장면 총리의 조카)가 맨해튼에 설립한 뉴욕 한인 공동체가 유일한 한인성당이었다. 1964년 도미한 정욱진 토마스 신부도 미국 성당의 보좌신부로 있으면서 이 한인공동체를 돕고 있었다. 박창득 신부는 여기서 신학교 은사인 정신부와 반가운 해후를 하게 된다. 

1970년대 초반 뉴욕뉴저지 일원에는 30여개의 개신교 교회가 있었으나 한인성당은 하나뿐이라 가톨릭 신자들은 편의를 쫓아 개신교회에 나가기 일쑤였다. 이를 가슴 아프게 생각하던 박신부는 1972년 여름부터 한인 5가정과 함께 우리말 미사를 드려오다 1972년 대림 첫 주일인 12월 3일 Our Lady of Victories 성당 부속 초등학교의 도서실에서 30여명의 한인신자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한 것이 뉴저지 한인 가톨릭 교회의 시초가 되었다. 당시 한인 천주교 신자들이 얼마나 한인 가톨릭 공동체의 설립을 목말라하고 있었는가는 공동체 설립 3주만에 맞은 그해 성탄대축일 미사에 150여명의 신자들이 참례한 것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당시 한인교회들은 신앙공동체임과 동시에 이민생활 정착을 지원하는 생활공동체이기도 했다. 박신부는 이민 신자들의 공항 픽업에서부터 아파트 찾아주기, 자녀들 입학, 직업 찾아주기, 병원 안내는 물론 이사 돕기, 아파트 수리, 직접적으로 생활비까지 지원해주어야 하는 초기 이민자들의 실질적 아버지 역할을 해야만 했다. 


★ 초고속 성장의 한인성당 

박신부는 신자수가 급격히 늘어남에 따라 성전을 74년 12월5일 몽클레어에 있는 St. Peter Claver Church로 옮겼다. 1977년 자체 성전 건립 기성위원회(위원장 김도영)를 발족시키고 모금운동에 들어간 후, 80년 11월16일 오랜지 시티 18 Cleveland St.의 Christian Scientist 교회건물과 사제관을 매입하고 성전이전 감사미사를 봉헌함으로써 자체성전 마련의 꿈을 이루었다. 성당 명칭을 St. Andrew Kim Church [성 김대건 안드레아 뉴저지 한인 천주교회]라고 명명 했다. 82년 본당설립 1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하신 김수환 추기경님은 정말 살아있는 공동체라고 칭찬 하신 후, 자체성전 마련을 위해 전 교우의 80%인 134명이 100일 동안 매일 고리 묵주기도를 바쳤다는 애기를 듣고 기도하는 공동체는 역시 다르다고 말씀 하셨다. 

당시 뉴저지성당은 신자수의 증가와 각 신신단체의 활성화, 연령별 친목단체의 확대로 회합 장소가 부족하여 사제관을 헐고 그 자리에 성당부속건물을 짓기 위해 기성회를 구성하여 모금운동을 폈다. 이 사실을 보고받은 뉴왁대교구장 McCarrick 대주교는 1986년 12월2일 뉴저지성당과 오랜지시티 센트럴 애브뉴에 있는 St.Venantius을 합병시키고, 박창득 신부를 새성당인 St.Venantius-St. Andrew Kim 성당의 본당신부로 발령했다. 뉴저지 성당은 새 성전으로 옮기고 12월7일 첫 미사를 봉헌했다. 이는 박신부가 1986년 대전교구에서 뉴왁대교구로 전입됐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박창득 신부의 본당신부 취임미사는 87년 3월29일 맥카릭 대주교의 집전으로 봉헌됐다. 오랜지 시는 박신부의 취임을 축하하기 위해 3월 29일을 박 어거스틴 신부의 날로 선포했다. 


★ 신자 나누어 공소 세우기 

그 사이 박창득 신부는 1978년 뉴욕대교구 소속의 스테튼 아일랜드 한인 공동체의 설립에도 밑거름 역할을 했다. 그 곳 한인들이 공동체 설립을 원하자 전담신부가 되어 사목활동을 했고, 1983년 애틀랜틱시티, 1984년 5월1일 이튼타운과 포트딕스에 공소를 설립하여 뉴저지 중남부의 신자들에게도 사목의 손길을 뻗쳤다. 이튼타운 공소는 1988년 9월25일 뉴저지성당의 보좌신부이던 김덕신 요셉 신부가 부임함으로써 본당으로 승격했고 현재 포트딕스 공소와 합쳐져 뉴저지 중부의 대표적 성당으로 발전했다. 

박신부는 뉴저지성당의 신자가 500가구가 넘을 즈음 신자를 나누어 1986년 포트리에 공소 [현재 새들브룩 103위 성당]를 설립했고, 이어 1989년 데마레스트, 1991년 6월 뉴브런스윅[현재의 메투천 성당]에 공소를 세웠다. 박신부는 등록신자 가정 수가 500가구가 넘으면 300가정은 유지하고 200가정은 나누어 공소를 설립하곤 했는데, 공소를 설립하면 얼마되지 않은 시간 안에 본당이나 공소가 모두 500가정에 육박, 한국에서 신부님을 모셔와 독립된 한인공동체로 발전시키고는 했다. 

포트리 공소는 1986년 5월31일 포트리 인근의 신자들을 분리 MaDonna Church에서 미사를 봉헌함으로써 시작 됐다. 박신부는 89년 11월 광주교구와 협의하여 송종의 신부를 모셔와 본당으로 독립시켰다. 포트리 성당은 그후 티넥으로 옮겼다가 다시 새들브룩으로 이전, 성 103위 성당으로 명명했다. 현재 모당이던 뉴저지 성당(현 메이플우드 성당)보다 더 많은 2,500명의 신자수를 자랑하고 있다. 

데마레스트 공소는 1989년 3월26일 부활대축일을 맞아 이 지역 신자들이 퀸즈성당에 교적을 두고 있는 신자들과 함께 St. Joseph Church에서 박창득 신부의 집전으로 미사를 봉헌함으로써 설립 됐다. 데마레스트 공소는 1990년 5월 31일 인천교구에서 최기산 신부(현 인천교구장)가 부임함으로써 본당으로 승격됐다. 현재는 2,300명을 포용하는 큰 성당이 됐다. 

1991년 6월30일에는 뉴저지 중부 에디슨, 뉴브런스윅 일대 거주 신자들을 위해 메타천 교구에 뉴브런스윅 공소를 개설 했다. 뉴저지 성당(통칭 오랜지 성당)은 뉴브런스윅 공소의 설립 기금은 물론 운영기금으로 3만 달러를 전달했다. 뉴브런스윅 공소는 1992년 부산교구 소속 최경용 베드로 신부의 부임으로 본당으로 승격하고 메타천 교구에 속하게 됐다. 뉴브런스윅 성당은 한때 신자들이 분리되었다가 다시 통합, 현재는 우드브리지에 자리잡은 메타천교구 한인성모성당으로 발전 했다. 

박신부는 또 한인밀집지역인 포트리 시에 한인성당이 없어서는 안된다며 2006년 교구청과 미국성당인 마돈나 성당과 교섭, 한인공동체를 만들었는데 현재 아들 신부인 이경 바오로 신부가 담당하고 있다. 이어 팰리세이즈 파크 시의 성 미카엘 성당에도 한인공동체를 신설, 한 달에 두 번씩 미사를 집전하고 있다. 


★ 성령운동, ME 등 신심운동 점화 

박창득 몬시뇰은 ▲1979년 가톨릭 성령쇄신운동을 미주한인 동포사목에 최초로 도입하여 1992~96년, 2008~현재 미 전국 성령봉사회 회장을 역임했다. ▲1983년 2월 ME 부부주말피정(Worldwide Marriage Encounter)을 미동부 동포사목에 최초로 도입했고, 1983~1992년, 1998~2007년 지도신부와 대표신부를 역임했다. ▲1987년 학생 피정 Antioch Program을 도입하여 청소년들의 신심향상을 도왔는데 이것은 후일 성소로 연결 되었다. 

당시 성령쇄신운동은 일종의 모험이었지만 그 역할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박신부는 79년 미국 성령 세미나에 참석, 처음엔 대단한 거부감을 가졌으나 세미나 후 자신도 모르게 자신을 변화시키는 성령을 체험하고 바로 이것이 주님과 한인 공동체를 위한 나의 미션이라고 생각하고 미 전국을 대상으로 성령쇄신 운동을 전개한다. 1979년 4월8일 미주한인 가톨릭 사상 처음으로 뉴저지 성당에서 성령기도회를 시작했고 그해 7월14일 마리안 슈라인 피정의 집에서 1차 성령세미나를 가짐으로써 미주 한인가톨릭에 성령의 불을 지폈다. 숱한 반대와 거부 속에서도 성령은 놀랍게 작용, 실제로 개인과 공동체가 변모함으로써 빠른 속도로 한인 가톨릭에 자리 잡아나갔다. 1994년 전국적으로 성령쇄신봉사자협의회(KSC)를 조직, 초대 회장을 역임한 후 2008년 다시 회장직을 맡아 현재에 이른다. 

1980년에 처음 참석한 ME 역시 마찬가지였다. 직접 체험해보고 배운대로 실천해보니 자신부터 달라졌다. Deeper 주말 체험 후 효과를 확신, 신자들에게 권했으나 거의 거부반응을 보였다. 결국 가까이 지내는 신자 부부를 떠밀다시피 세미나에 보냈는데 교육을 마친 신자들의 생활이 놀랍게 변하는 것을 보고 거부하던 신자들도 달라졌다. 83년 2월18일 제1차 미동북부 ME 주말피정을 갖자 17쌍의 부부가 참가함으로써 뉴저지성당은 ME운동의 본고장이 됐다. 이후 LA 등 미 전국을 돌며 ME를 보급했다. 역시 결과는 하느님의 역사에 힘입어 대성공을 거두었다. 한인 ME는 미국ME의 Section 3에 속했었으나 현재는 미국 가톨릭에서도 인정을 받아 지역에 관계없이 한인들만으로 Section 19를 구성,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박신부는 이어 성령운동을 기초로 레지오 마리애, 꾸르실료, 크리스챤공동체(MBI), 에니오그램 등 각종 신심운동에 활력을 불어 넣었다. 특히 구역회를 통한 성서묵상 운동은 큰 효과를 거두고 있다. 87년에 시작한 청소년 안티옥 피정도 성령운동이 낳은 옥동자이다. 이 피정에 고백성사를 담당하러 참석했던 미국신부들도 안티옥 피정의 역동성과 효능에 깜짝 놀랐다. 당시 뉴왁교구청에서 나온 Cruz 신부는 hope that I will have a pastor like Fr. Park라고 했는데 몇 년 참석 후엔 hope that I would be a pastor like Fr. Park 라고 했다. Cruz 신부는 2009년 9월 8일 뉴왁 대교구의 보좌 주교님이 됐다, Antioch 학생 피정은 현재도 1.5세 한인 신부님들에 의해 계속되고 있습니다. 


★ 1983년 북미주 한인사제협의회 창립 

박창득 신부는 1983년 미주한인사제 협의회를 창립하여 회장으로 활동하면서 1984년 미국 주교회의 이주 및 관공사목위원회 자문위원, 1991~1995년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이주사목위원회 북미주 동포사목부 총대리로 활동하면서 미주 한인 가톨릭의 발전에 앞장섰다. 

박신부는 84년 1월 뉴저지 성당에 신용조합을 설립했고, 4월 의사 신자들로 누가회를 구성하여 신자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었다. 신용조합은 현재 소규모 은행수준으로 발전했고, 누가회는 자체 진료실까지 마련하고 매주 신자들에게 봉사하고 있다. 

박창득 신부는 바뇌 성모발현지를 순례한 후 1992년 6월6일 오랜지 성당에 한국 및 북미주 바뇌 국제 기도회 본부를 결성하고 지도신부를 맡았고, 2001년 낙태종식을 위항 묵주기도 100만단 운동을 벌였다. 2003년 창립30주년을 맞아 구역별 성경 팔사 운동을 펴 15권의 필사본을 만들었다. 이 중 1권은 뉴왁대교구에 기증했고 5권은 성당 곳곳에 전시되어 있다. 2권은 2008년 3월 바티칸으로 원정 교황의 강복을 받았다. 


★ 아들 신부 10명성소 꽃 피우다 

박창득 신부를 얘기할 때 가장 중요한 일은 현재까지 10여명의 성직자와 수도자를 배출했다는 것이다. 박신부는 오랜 한인사목과 12년간의 사제협의회 회장을 역임하면서 한인 교회는 미국 현지에서 서품을 받은 한인 1.5세와 2세들이 사목을 담당해야 한다고 결론 내리고 뉴저지 상당을 중심으로 안드레아회를 조직, 성소를 위해 기도해 왔다. 

그 결과 ▲1998년 이승윤 데이빗 신부를 시작으로 ▲1998년 이윤나 데레사 수녀[미 살레시안 수녀회] ▲1999년 조민현 요셉 신부 [현 메이플우드 본당신부] ▲2001년 박홍식 돈 보스코 신부 [현 세들브룩 성103위 성당 본당신부] ▲2003년 김정수 디다고 신부 [현 데마레스트 성당 본당신부] ▲2003년 김성규 요셉 종신부제 [펠리세이즈파크 성 미카엘 성당] ▲2006년 조후연 야고보 신부 [메이플우드 성당 보좌] ▲2006년 이 경 신부 [포트리 성당 한인공동체 담당] ▲2008년 박젬마 수녀 [오순절 평화의 수녀회] ▲2010년 5월27일 이충우 미카엘 부제가 패터슨 교구에서 서품을 받았고 [2011년 사제서품 예정] ▲현재 로마 그레고리안 신학교에 유학중인 조홍래 베드로 학사가 2010년 10월5일 부제품을 받는다 [2011년 사제 서품 예정] ▲또 홍성계 스테파노 학사가 뉴왁교구 시튼홀 신학교에 재학 중이다. 이들은 현재 뉴왁대교구 내 전 한인성당의 본당신부로 사목하고 있어 뉴왁교구의 한인성당들은 모두 완전한 현지 사제화를 이루었다. 박신부는 이들 아들 신부들과 함께 양업회를 조직, 사제성소를 위해 지속적인 활동을 하고 있다. 


★ 문서 선교 북한 선교에도 앞장 

박몬시뇰은 1986년 사제서품 25주년 은경축을 맞아 월간 신앙지 미주 가톨릭 다이제스트를 창간했고, 한영 매일미사를 발간하여 한인교회와 신앙의 내실화를 기하기도 했다. 1988년 평화신문 미주지사를 맡아 신문을 발행함으로써 문서선교의 새 장을 열었다. 이들 간행물은 현재도 계속 발간됨으로 신자들의 신앙생활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박창득 몬시뇰은 또 중국과 북한선교에도 헌신, 1980년과 84년 두 차례 당시로서는 큰 위험을 무릎쓰고 중국을 방문, 백두산을 등정하며 북한선교의 가능성을 타진하고 김대건 신부의 발자취를 찾아 보았다. 그 무렵 한국의 건설근로자들이 중동에 진출했는데,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일하는 한인 신자 근로자들이 고백성사를 보지 못해 고통스러워 한다는 얘기를 듣고는 건설기술자로 신분을 위장하고 사우디에 입국, 미사와 성사를 집전하기도 했다. 

1989년 2월 미주한인신자들과 함께 평양을 방문하여 장충성당에서 분단 이후 최초의 남북 신자 합동미사를 봉헌 했다. 박몬시뇰은 그 후 한국 천주교 평양교구서리 김수환 추기경의 뜻에 따라 30여 차례 북한을 방문하며 장충성당에 성모상을 모셨고 성령쇄신 세미나를 열었다. 1995년 10월27일 북한 교우들을 미국에 초청하여 한국 -북한-재미동포 신자 세미나를 가졌다. 또 96년과 98년 부활대축일을 맞아 평양을 방문, 서울 명동성당-평양 장충성당-미국 오랜지 성당을 잇는 동시 부활미사를 봉헌 했다. 

박신부는 북한을 방문 할 때마다 성모님의 기적의 패를 모시고가 북한 곳곳의 방문지에 살포했다. 특히 1996년부터 북한의 극심한 식량난을 돕기 위해 평양에 국수공장을 세워 2002년 까지 매월 밀가루를 보냈고, 2007년에는 평양에 라면식당을 개설했다. 



★ 아낌없이 주는 나무” 

박몬시뇰은 2000년 4월30일 몬시뇰에 서임됐고, 2000~2005년 뉴왁대교구 한인사목 대표 (Coordinator of Korean apostolate in Newark Archdiocese) 로 활동했다. 2001년 본당신부직을 사임했다. 2002년 팰리세이즈파크에 가톨릭복지회관을 설립 (현재 명칭은 가톨릭센터)하여 신자들을 돕고 있다. 2002년 김택구 신부(고인)와 함께 남미 선교회를 설립하고 서울 국제선교회로 등록했다. 

2005년 12월31일 은퇴한 후 2008년 발병한 간암과 투쟁하면서도 현재도 1년에 몇 차례씩 미국-서울-중국-북한-남미를 왕래하며 북한과 중국, 남미 선교사업, 미주한인가톨릭 역사 정리 사업, 성소계발 사업 등에 헌신하고 있다. 

박몬시뇰의 맏아들 신부인 메이플우드 성당 주임 (현 뉴져지 팔리사이드 팍크 성 미카엘 본당 주임) 조민현 신부는 2010년 8월29일 주일 미사 강론을 통해, 마침 8월 28일로 영명축일을 맞은 박몬시뇰의 일생에 대해 첫째 주님께서 모든 일을 이루어 주신다는 가능성을 믿었고, 둘째 그 희망에 따른 시도(실천)를 했고, 셋째 주님의 은총으로 그 열매를 맺으신 분이라고 말했다. 

2005년 은퇴미사 때 신자들은 온 마음을 모아 제대 오른편에 " 박몬시뇰님은 저희들에게 아낌없이 주는 나무이셨습니다 . 감사합니다 " 라는 대형 배너를 걸었다. 이제 박 몬시뇰은 2011년 3월25일 사제서품 50주년(금경축)을 맞는다. 현재 뉴왁교구내 모든 한인성당들은 힘과 정성을 합해 금경축 축하 미사 봉헌과 감사의 잔치를 준비하고 있다. 각 성당의 주임신부는 모두 아들 신부라 모두가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앞장서고 있다. 신자들은 오늘도 주님 저희 이민자 신자들에게 오늘날의 아브라함, 베드로와 바오로 같은 박창득 몬시뇰을 보내주심에 감사 합니다. 그 분을 통해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기도하고 있다. <송의용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작성>

( 뉴져지 메이플 우드 한인 성당 홈페이지에 2010-10-27자로 올려진 기사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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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득 몬시뇰은 올 6월 자신이 설립하고 운영하는 북한 나진시 동명유치원을 방문, 어린이들이 건강하게 자라고 있다는 사실을 직접 보고, 평생의 염원인 ‘북한돕기-선교’ 사업이 하느님의 뜻 안에서 결실을 맺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동명유치원 어린이들이 다른 지역의 어린이들 보다 키도 더 크고 몸무게도 더 많이 나간다는 사실을 두 눈으로 확인했으니…, 이젠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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