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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의 특별 희년 선포  칙서

 자비의 얼굴
(Misericordiae Vultus)
 
하느님의 종들의 종 로마 주교 프란치스코가
이 편지를 읽는 모든 이에게 은총과 자비와 평화를 빕니다.
 
 
1.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의 얼굴이십니다. 그리스도 신앙의 신비는 이 말로 잘 요약되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자비는 나자렛 예수님 안에서 생생하게 드러나 그 정점에 이르렀습니다. “자비가 풍성하신”(에페 2,4) 아버지께서는 모세에게 “자비하고 너그러운 하느님, 분노에 더디고 자애와 진실이 충만한 하느님”(탈출 34,6 참조)이라고 당신 이름을 알려 주시고 역사를 통하여 여러 가지 방법으로 당신의 거룩하신 본성을 끊임없이 보여 주십니다. 구원 계획에 따라 모든 것을 마련하시고 “때가 차자”(갈라 4,4) 아버지께서는 당신 아드님을 보내시어 동정 마리아에게서 태어나게 하시고 우리에게 완전한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뵌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입니다(요한 14,9 참조). 나자렛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과 행동, 당신의 온 인격으로 하느님의 자비를 드러내십니다.
 
2. 우리는 언제나 자비의 신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 신비는 기쁨과 고요와 평화의 샘입니다. 여기에 우리 구원이 달려 있습니다. 자비라는 말은 거룩한 삼위일체 하느님의 신비를 보여 줍니다. 자비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만나러 오시는 궁극적인 최고의 행위입니다. 자비는 인생길에서 만나는 형제자매를 진실한 눈으로 바라보는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자리 잡는 근본 법칙입니다. 자비는 하느님과 사람을 이어 주는 길이 되어 우리가 죄인임에도 영원히 사랑받으리라는 희망을 품게 해 줍니다.
 
3. 우리는 특별히 주님의 자비에 주의를 기울여 우리 자신이 자비를 베푸시는 아버지의 뚜렷한 표지가 되도록 부름 받을 때가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저는 자비의 특별 희년을 선포합니다. 이 특별 희년에 신자들이 더욱 힘차고 효과적인 증언을 하여 교회에 은총의 때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 성년은 2015년 12월 8일,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에 시작됩니다. 이 대축일은 하느님께서 인류 역사의 맨 처음부터 어떻게 활동하셨는지를 상기시켜 줍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은 후에 하느님께서는 인류를 죄악에 얽매인 채로 버려두고자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사랑으로 거룩하고 흠 없는 마리아를 선택하시어 인간 구원자의 어머니가 되기를 바라셨습니다(에페 1,4 참조). 무거운 죄에 대하여 하느님께서는 완전한 용서로 응답하셨습니다. 주님의 자비는 언제나 어떠한 죄보다도 더 크므로 그 누구도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막을 수 없습니다.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에 저는 성문(聖門)을 여는 기쁨을 누릴 것입니다. 그날, 성문은 자비의 문이 될 것입니다. 그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누구나 위로하시고 용서하시며 희망을 불어 넣어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대림 제3주일에 로마 주교좌 대성당, 곧 성 요한 라테라노 교황 대성전의 성문이 열릴 것입니다. 이어서 다른 교황 대성전들의 성문이 열리게 될 것입니다. 바로 그 주일에 저는, 모든 개별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로, 신자들의 어머니 교회인 주교좌 대성당이나 공동 주교좌 대성당, 또는 특별히 중요한 성당에서 자비의 문을 열고 성년 내내 열어 두라고 선포할 것입니다. 많은 순례자들이 방문하는 순례지에서도 교구장 주교의 권위로 자비의 문을 열 수 있습니다. 이러한 거룩한 장소에서 순례자들은 마음으로 은총을 체험하고 회개의 길을 찾게 됩니다. 이렇게 모든 개별 교회는 직접 참여하여 이 성년을 특별한 은총의 때와 영적 쇄신의 계기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로마와 더불어 개별 교회에서도 온 교회의 가시적 친교의 표징으로 이 희년을 지내기 바랍니다.
 
4. 제가 12월 8일을 선택한 것은 이날이 교회의 근대사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사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폐막 50주년이 되는 이날 성문을 열 것입니다. 교회는 이 공의회를 생생하게 기억하여야 합니다. 이로써 교회는 역사 안에서 새로운 길을 걷기 시작하였습니다. 참으로 성령 강림 때처럼 공의회 교부들은 하느님에 대하여 동시대인들이 알아들을 수 있게 말해야 할 필요성을 강렬하게 느꼈습니다. 오랫동안 교회를 안온한 도성처럼 감싸 주던 성벽은 무너져 버리고, 새로운 방식으로 복음을 선포해야 할 때가 왔습니다. 복음화의 새로운 길이 열린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임무는 열정과 확신으로 신앙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세상에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생생하게 보여 주어야 할 책임을 각성하였습니다.
 
요한 23세 성인이 공의회를 시작하며 교회가 나아가야 할 길을 밝혔던 뜻깊은 말씀을 되새깁니다. “이제 그리스도의 신부는 엄격함이 아닌 자비의 영약을 사용하고자 합니다. …… 가톨릭 교회는 공의회를 통하여 신앙 진리의 횃불을 높이 들고, 사랑이 넘치는 모든 이의 어머니, 인자하고 인내하는 어머니, 갈라져 사는 자녀들에게 다정하고 자비로운 어머니로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자 합니다.” 바오로 6세 복자는 공의회를 마치면서 같은 맥락에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우리 공의회의 신앙은 무엇보다도 먼저 사랑이었음을 강조하고자 합니다. …… 착한 사마리아인의 옛 이야기가 우리 공의회의 정신을 이끌어 준 모범이자 규범이었습니다. …… 공의회는 현대인들에게 열정과 감동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오류는 완전히 거부되었습니다. 진리만이 아니라 사랑 그 자체도 오류를 거부합니다. 사람은 언제나 존중하고 사랑해야 하지만 오류는 경계하여야 합니다. 공의회는 분명히 정신을 혼란시키는 질병을 깨닫고 위로가 가득한 구원의 영약을 가져다주었으며 불길한 징조를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희망과 신뢰의 메시지를 현대인들에게 전하였습니다. …… 다음과 같은 것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이 공의회의 풍요로운 가르침은 인간에게 봉사하려는 단 하나의 목적을 지니고 있습니다. 모든 환경에서 살아가는 인간, 온갖 나약함을 지닌 인간, 갖가지 요구를 지닌 인간에게 봉사하려는 것입니다.”
 
이러한 정신으로 교회가 받은 것에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제 앞에 놓인 직무에 대한 책임감으로, 순례하는 우리를 지켜 주시고 보호하시는 부활하신 주님의 힘을 굳게 믿으며 저는 성문을 열고 지나갈 것입니다. 믿는 이들의 발걸음을 그리스도의 구원 활동에 협력하도록 이끄시는 성령께서 하느님의 백성을 일으켜 세우시고 이끌어 주시어 그들이 자비의 얼굴을 바라보도록 도와주시기를 빕니다.
 
5. 희년은 2016년 11월 20일 그리스도 왕 대축일에 끝날 것입니다. 그날 성문을 닫을 때, 우리는 그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이렇게 특별한 은총의 시간을 주신 성삼위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을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교회의 삶과 모든 인간과 무한한 우주를 주님이신 그리스도께 맡겨 드리며 미래의 풍요로운 역사를 이루려고 노력하는 모든 사람에게 당신의 자비를 아침 이슬처럼 내려 주시기를 빌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해마다 자비가 넘쳐 우리가 모든 사람에게 다가가 하느님의 선하심과 온유하심을 가져다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 가운데에 이미 현존하는 하느님 나라의 표징으로서 자비의 향유가 믿는 이나 믿지 않는 이나 모든 이에게 전해지기를 빕니다.
 
6. “자비를 베푸시는 것이 하느님의 고유한 본질입니다. 바로 그 자비 안에서 하느님의 전능이 드러납니다.”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이 한 이 말씀은, 하느님의 자비가 나약함의 표시가 아니라 전능하신 하느님의 특성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이유로 전례의 가장 오래된 본기도에서 우리는 “전능하신 하느님, 크신 자비와 용서를 베푸시고” 라고 기도합니다. 하느님은 인류 역사에 언제나 가까이 계시며 섭리하시는 분, 거룩하고 자비로우신 분으로 현존하실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서는 분노에 더디시고 자비로우신 분이라는 말로 자주 하느님의 본성이 묘사됩니다. 하느님께서 자비로운 분이시라는 것은 그분의 인자하심이 징벌과 파멸보다 앞서는 구원 역사의 많은 순간들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특히 시편은 주님의 위업을 이렇게 찬양합니다. “네 모든 잘못을 용서하시고 네 모든 아픔을 낫게 하시는 분, 네 목숨을 구렁에서 구해 내시고 자애와 자비로 관을 씌워 주시는 분”(시편 103[102],3-4). 시편의 다른 곳에서는 더욱 명확하게 주님 자비의 구체적인 표지를 보여 줍니다. “억눌린 이들에게 올바른 일을 하시며 굶주린 이들에게 빵을 주시는 분이시다. 주님께서는 붙잡힌 이들을 풀어 주시고 눈먼 이들의 눈을 열어 주시며 꺾인 이들을 일으켜 세우신다. 주님께서는 의인들을 사랑하시고 이방인들을 보호하시며 고아와 과부를 돌보신다. 그러나 악인들의 길은 꺾어 버리신다”(시편 146[145],7-9). 시편 작가는 이렇게 표현하기도 합니다.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고치시고 그들의 상처를 싸매 주신다. …… 주님께서는 가난한 이들을 일으키시고 악인들을 땅바닥까지 낮추신다”(시편 147[146-147],3.6). 그러므로 하느님의 자비는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라 당신의 사랑을 보여 주는 구체적인 실재입니다. 이는 부모가 자기 자녀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과 같습니다. 정녕 애끊는 사랑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 사랑은 온유한 배려와 너그러운 용서가 넘치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자연스럽게 솟구치는 사랑입니다.
 
7.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이는 하느님의 계시 역사를 노래하는 시편 136편의 모든 절마다 반복되는 후렴구입니다. 자비를 통하여 구약의 모든 사건이 심오한 구원의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자비는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역사를 구원의 역사로 변화시켜 줍니다. 이 시편처럼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라고 계속해서 반복하는 것은 공간과 시간의 차원을 뛰어넘어 모든 것을 영원한 사랑의 신비 안으로 들여놓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는 역사 안에서만이 아니라 영원토록, 인간은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로운 눈길 아래 있으리라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듯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른바 대찬양이라고 하는 이 시편을 그들의 가장 중요한 전례 축일에 포함시키고자 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수난하시기 전에 이 자비의 시편으로 기도하셨습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찬미가를 부르고 나서”(마태 26,30) 올리브 산으로 갔다고 말했을 때 이를 증언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찬례를 당신과 당신의 파스카 희생에 대한 영원한 기념제로 제정하시면서, 자비의 빛이 상징적으로 이 최고의 계시 행위를 비추게 하셨습니다. 바로 그 자비의 지평에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완성될 위대한 사랑의 신비를 의식하시며 수난하시고 돌아가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께서 이 시편으로 기도하셨다는 것을 알게 되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시편을 더욱 중요하게 여기고, 날마다 바치는 기도에서 이 찬미의 후렴구를 노래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8. 우리가 예수님과 그분의 자비로운 얼굴을 끊임없이 바라보면 거룩하신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사랑의 신비를 온전히 드러내라는 임무를 아버지께 받으셨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1요한 4,8.16). 이는 요한 복음사가가 성경 전체에서 처음이자 유일하게 단언하고 있습니다. 이 사랑은 이제 예수님의 온 삶에서 눈에 보이게 분명히 드러났습니다. 그분께서는 오직 사랑, 자신을 거저 내어 주는 사랑이십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사람들과 그분께서 맺는 관계는 각기 유일무이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특별히 죄인이나 가난한 이들, 버림받은 이들, 병자들, 고통 받는 이들에게 행하신 모든 기적은 자비를 보여 줍니다. 그분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자비로 드러납니다. 그분 안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 자비가 넘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라오는 군중을 보시자 그들이 지도자 없이 길을 잃고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는 것을 알아채시고 무척 가엾은 마음이 드셨습니다(마태 9,36 참조). 그분께서는 가엾게 여기시는 마음으로 사람들이 데려온 병자들을 고쳐 주시고(마태 14,14 참조), 빵 몇 개와 물고기 몇 마리로 수많은 군중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마태 15,37 참조). 이 모든 상황에서 예수님을 움직인 것은 다름 아닌 자비였습니다. 그 자비로 당신께서 만난 사람들의 마음을 읽고 그들의 절실한 바람을 채워 주셨습니다. 외아들의 장례를 치르러 가는 나인의 과부를 만나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울부짖는 어머니의 커다란 고통을 보시고 무척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 아들을 죽음에서 다시 일으켜 어머니에게 돌려주셨습니다(루카 7,15 참조). 게라사인 지방에서 마귀 들렸던 사람을 고쳐 주시고,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너에게 해 주신 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신 일을 모두 알려라”(마르 5,19). 마태오를 부르신 것도 자비의 맥락 안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관 앞을 지나시다가 마태오를 바라보셨습니다. 그 사람의 죄를 용서하시는 자비의 눈길이었습니다. 제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예수님께서는 죄인이며 세리인 그를 뽑아 열 두 사도 가운데 하나로 삼으셨습니다. 베다 성인은 이 복음 구절을 설명하면서, 예수님께서 마태오를 자비로운 사랑의 눈길로 바라보시고 그를 선택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자비로이 부르시니”(miserando atque eligendo)라는 말씀에 감동을 받아 저는 이를 제 문장에 넣었습니다.
 
9. 자비에 관한 비유들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본성을, 온갖 반대를 물리치시고, 연민과 자비로 끝까지 용서하시는 아버지의 본성으로 보여 주십니다. 우리는 이러한 비유들 중에 세 가지 이야기, 곧 되찾은 양, 되찾은 은전과 되찾은 아들의 비유를 잘 알고 있습니다(루카 15,1-32 참조). 이 비유들에서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기쁨에 넘치시는 분으로 그려집니다. 특히 하느님께서는 용서를 해 주실 때에 더욱 기뻐하십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복음과 우리 신앙의 핵심을 발견합니다. 자비는 모든 것을 이겨내는 힘으로 드러나며, 마음속을 사랑으로 가득 채워 주고 용서를 통하여 위로를 가져다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