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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은 당신을 만나는 모든 이가 자비를 느끼도록 해주십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삼종 기도와 일반 알현 강론



프란치스코 교황은 6월 15일 수요일, 일반 알현 가르침을 통해 루카 복음서에서 예리코의 장님이 다시 볼 수 있도록 해주신 예수님의 일화를 묵상하며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그분을 따르는 이들이 도움과 위안의 필요가 있는 사람들을 알아볼 수 있도록 모두를 일치시키는 자비와의 만남이라고 언급하였다.  교황은 복음서의 자비와 관련된 가르침을 계속하면서 자비는 빛과 같은 것이라고 하였다. 믿음의 눈으로 예수님께 청했던 장님이 다시 볼 수 있게 되자 예수님을 따르고 하느님을 찬양하며 걸인에서 제자가 되었음을 언급하며, 우리 모두 매일의 삶에서, 어려움과 죄로 인하여 구원이 필요한 걸인에서 제자가 되는 길을 가야 할 것이라고 하였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알현  강론 전문

"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예수님께서 하루는 예리코에 가까이 이르셔서 길가에서 구걸을 하던 장님의 눈을 다시 뜨게 만드는 기적을 행하셨습니다.(루카 18.35-43) 오늘은 우리에게도 직접적 연관이 있는 이 표징의 의미를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장님이 길가에 앉아 구걸을 하고 있었다고 말합니다.(35절) 그 시대에 그리고 얼마전까지만 해도 장님은 구걸하는 돈으로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장님의 모습은 오늘날에도 만날 수 있는 신체적 장애나 다른 이유로 사회에서 소외받고 있는 이들을 대변합니다.  이들은 사람들과 분리되어,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에 잠겨있거나 다른 것들로 바쁘게 지나칠 때 그곳에 앉아있습니다. 거리는 만남의 장소가 될 수도 있는 곳이지만 그에게는 외로움의 장소입니다. 사람들은 지나가 버립니다. 그는 혼자 있습니다. 소외된 이의 모습은 슬픕니다. 그중에서도 화려하게 번성한 사막의 오아시스인 예리코라는 곳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탈출하여 긴 여정끝에 도착한 곳이 예리코 입니다. 도시는 약속의 땅에 들어서는 문을 의미합니다. 모세가 그 당시 선포하였던 말을 기억해 봅시다.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주시는 땅 어느 성에서 너희 동족 가운데 가난한 이가 있거든, 가난한 그 동족에게 매정한 마음을 품거나 인색하게 굴어서는 안 된다. 그 땅에서 가난한 이가 없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 땅에 있는 궁핍하고 가난한 동족에게 너희 손을 활짝 펴 주라고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이다.’(신명기 15.7,11) 하느님의 법이 권고하는 것과 복음에서 설명하고 있는 그곳의 상황이 상반되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장님이 소리를 지릅니다. 목소리가 좋았던 모양입니다. 장님이 부르짖어 예수님을 청할 때 사람들은 그에게 다가가 침묵하게 만들려고 합니다. 마치 말할 권리가 없는 듯 말입니다. 그에 대한 연민은 없고 오히려 꾸짖습니다. 

우리들도 얼마나 자주 거리의 사람들을 봅니까. 도움이 필요하고 아픈 걸인들을 보면 그들이 먹을 권리도 없는 듯 짜증이 납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도망자들과 난민들을 만나 짜증을 내는지요. 우리 모두가 이런 유혹이 있습니다. 아닌가요? 저를 포함한 모두의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를 가르치십니다. 장님과 귀머거리를 향한 무관심과  적의는 우리가 형제들을 바라보지 못하도록 막으며 그들 안에서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도록 합니다. 무관심과 적의. 무관심과 적의는 공격성을 띄게 되고 조롱을 하게 만듭니다. ‘이들을 다 밖으로 내몰아.’ ‘다른 곳으로 보내버려.’ 이러한 공격성은 장님이 울부짖을 때 ‘넌 보지도, 말하지도, 부르짖지도 말라’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흥미로운 점을 하나 발견합니다. 복음사가는 군중들 중의 한명이 장님에게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37절)라고 말하는 이유를 설명해 줍니다.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고 언급한 동사는 탈출기에서 이집트 땅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구한 파괴의 천사가 지나간다(탈출 12.23)고 했던 것과 같은 동사입니다. 과월절의 지나감이며 해방의 시작입니다. 예수님께서 지나가실 때 언제나 해방이 있고 구원이 있습니다. 장님에게는 자신의 과월절이 선포된 것과 같았을 것입니다. 두려움 없이 장님은 예수님을 다윗의 후손으로서, 이사야 예언자가 언급한 눈먼 이들의 눈을 열어줄 기다리던 메시아(이사 35.5 참조)로 알고 그분을 향해 여러번 부르짖습니다.  

군중들과는 다르게 장님은 신앙의 눈으로 봅니다. 그렇기에 장님의 호소는 실질적인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 그 목소리를 듣고 ‘예수님께서는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데려오라고 분부하셨습니다.’(40절) 예수님은 이를 통해 장님을 길가에서 제자들과 군중의 관심 한 가운데로 이끌어 내십니다. 우리 자신들에 대해서도 생각해 봅시다. 어려운 상황이 처해 있을 때, 죄의 상황에 처해있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 상황에서 손을 잡아주시고 구원의 언저리에 있던 우리를 이끌어 내십니다.


두 가지 내용이 현실화 됩니다. 첫째는 사람들이 장님에게 기쁜 소식을 이미 선포하였습니다. 하지만 그와 뭔가를 함께 하고 싶어하지는 않았습니다. 이제는 예수님께서 복음의 선포는 소외된 이들을 한 가운데로 데려 나오늘 것임을  모두가 의식하도록 요청하십니다. 두번째는 장님이 볼 수 없었지만 자신의 믿음으로 구원의 길을 열 수 있었고, 길을 따라가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주님께 향하는 길은 도움이 필요한 이들과 위안이 필요한 이들이 누군지를 깨닫을 수 있도록 그분 주변의 모두와 하나가 되도록 해주는 자비와의 만남입니다. 우리의 삶에도 예수님이 지나가십니다. 예수님이 지나가실 때 내가 그것이 그분 가까이에 가는 초대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더 좋은 사람, 더 좋은 그리스도인, 예수님을 따르는 이가 되도록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장님이 다가오자 질문을 던지십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41절) 예수님의 이 말씀은 놀랍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겸손한 종처럼 장님 앞에 계십니다. 하느님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를 위해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내가 너를 어떻게 섬기면 되겠느냐?’ 하느님께서 죄인의 종이 되셨습니다. 장님은 예수님께 ‘다윗의 자손’이라고 더이상 호칭하지 않습니다. 이젠 ‘주님’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초기 교회에서부터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호칭입니다. 장님은 다시 볼 수 있기를 청하고 그의 소원은 들어졌습니다.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41-42절) 그는 예수님을 청하고 그분과의 완전한 만남을 원하여 자신의 믿음을 드러내었고, 이를 통해 구원의 선물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믿음 덕분에 이제는 볼 수 있으며 그 무엇보다 예수님으로 부터 사랑받았다고 느낍니다.  이야기는 장님이 ‘다시 보게 된 후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랐다’(43절) 라고 끝납니다. 제자가 된 것입니다. 걸인에서 제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길입니다. 우리 모두는 걸인입니다. 언제나 구원을 필요로 합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매일매일 걸인에서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처럼 장님은 주님의 뒤를 따르며 그분 공동체의 일부분이 되어 갑니다. 사람들이 조용히 하기를 바랬던 그가 이제는 나자렛 예수님과의 만남을 큰 목소리로 증언합니다. ‘군중도 하느님께 찬미를 드렸다.’(43절)고 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기적이 일어납니다. 장님에게 일어났던 일이 군중들에게도 일어나 드디어 그들이 보게됩니다. 같은 빛이 찬양의 기도로 일치하는 모든 이에게 비춥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자비를 느끼도록 해주십니다. 불러주셔서, 그분께 다가설 수 있도록 하시고, 함께 하도록 해 주시며, 치유해 주시며 빛나도록 해주시고, 자비로운 당신 사랑의 경이로움을 함께 기리는 새로운 민족을 창조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불러 주시도록 합시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치유하실 수 있도록 해드립시다. 예수님을 따르며 하느님을 찬양합시다. 그리 될 것입니다! 
(http://kr.radiovaticana.va/news/2016/06/15/ 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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