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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 1. 고해성사

2014.01.19 13:08

평화 조회 수:16805

Christ Risen Medjugorje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기 전까지는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를 받을 수 없습니다.
고해성사  (Confession)

복자 풀톤 쉰 대주교

 

 

오늘은 고해성사에 관해서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여러분은 죄가 없으니 고해성사가 필요없을 것이기에 중요부분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몇 가지 이야기로서 시작하겠습니다. 스코틀랜드의 몰란 신부님께서 어느 저녁 고해성사를 주고 계실 때, 한 어린 소년이 고해소에 들어왔습니다. "내가 오후에 어린이들 고해성사를 주고 있을 때 왜 오지 않았니?" 신부님이 소년에게 물었습니다."죄가 하나도 없어서 죄를 지을때까지 기다려야 했어요." 소년이 대답했습니다. (청중 웃음) 

 

캐나다에서 벌목꾼 한 무리가 고해소에 가기로 했는데, 그들은 최근 몇년간 성사를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가장 대담한 이를 골라 고해소에 먼저 들여보냈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신부님, 저는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모든 죄를 다 지었습니다.""그렇다면 살인을 했습니까?" "그건 하지 않았습니다.""그렇다면 양심성찰을 충분히 하지 않은 것이니 고해소 밖에서 다시 성찰하고 오십시오."그는 고해소 밖에 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던 동료 벌목꾼들에게 말했다. "가자구. 이 신부님은 살인죄만 취급하신대." (청중 웃음)

 

언젠가 내가 고해성사를 주고 있었는데, 고해소에 한 소년이 들어왔습니다. 그가 말한 것중에 이런 것이 있었습니다. "제가 땅콩을 늪에 밀어넣었어요". 나는 그 말에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 모든 죄를 다 이해할 만큼 내가 신학을 잘 안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소년이 들어와서 같은 말을 했습니다. 그 다음 소년도 같은 말을 했습니다. 약 10~12명 정도가 들어와서 같은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한 소년이 들어왔습니다. 나는 말했습니다. "너도 땅콩을 늪에 밀어넣었다고 말할 것 같은데?" "아니요. 제가 땅콩이예요!" (청중 웃음)

 

여러분 이 이야 기를 좋아하는군요. 하지만 하루종일 이야기만 할 수는 없으니 이제는 어른들을 위한 이야기로 들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인류의 역사상 거의 처음으로 죄의식과 죄를 부인하는 세대에 살고 있습니다. 모든 이들은 자신이 원죄없이 잉태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에 죄인은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환자일 뿐입니다. 통회하는 마음도 없습니다. 캔사스의 메닌저 연구소(역자 주: 미국의 유명한 정신의학 연구소)의 칼 메닌저 박사는 "죄에 무 슨 일이 생겼는가?"라는 저서를 저술했습니다.

 

윤리신학자들과 교리문답은 죄를 저버리는데 이 정신과 의사가 죄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에 따르면, 신학자들이 죄를 저버리면서, 변호사들이 이를 가져갔고, 이는 일종의 "범죄"가 되었습니다. 원칙주의자들이 죄를 저버리면서, 정신과 의사들이 이를 가져갔고, 이는 "콤플렉스"가 되었습니다. 죄는 이 세상의 현실입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이기 때문에 이 사실을 직면해야 합니다. 기실,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기 전까지는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를 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죄와 죄책감을 억누를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봅시다. 사람들은 죄를 저지르고, 그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여성들도 똑같습니다. 이는 우리의 마음, 그리고 때로는 신체에 엄청난 영향을 줍니다.


 

우리 영혼에 죄가 들어오면 불안해지고, 마음은 불행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를 표면으로 떠올려 인식하지 않고, 주님께 고백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는지 봅시다. 여러분은 신장, 심장 등 인체의 장기이식이 부적합으로 실패한 예를 아실 겁니다. 이는 우리 몸의 항체(抗體, antibody)로 인해 이식되는 개체가 동화(同化, assimilate)되지 않아 인체가 저항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영혼도 비슷합니다. 영혼에도 항체가 있습니다. 우리 영혼에 죄가 들어오면 우리는 불안해지고, 마음은 불행합니다. 이는 마치 부러진 뼈에서 통증이 오는 것과 비슷합니다. 뼈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기에 아픈 것입니다. 우리의 양심이 있어야 할 제자리에 있지 않으면, 고통스럽고 불편해집니다. 술이나 다른 유희로 이를 잊으려 할 수도 있겠지만, 고요한 가운데, 죄책감은 그대로 있습니다.

 

유명한 세익스피어의 희극 "맥베드"에서 죄책감이 어떻게 그려졌는지를 봅시다. 정신의학이 등장하기 수백년 전 세익스피어는 이미 맥베드를 통해서 정신증(psychosis)을, 그리고 맥베드 부인을 통해 신경증(neurosis)를 각각 그려내고 있습니다. 맥베드는 왕위를 찬 탈하기 위해 왕을 살해한 후 자신의 눈앞에서 늘 단검이 떠다니는 것을 봅니다. 이는 정신증 으로서 그의 죄의식이 분출되는 방법 이었습니다. 맥베드 부인은 손에 묻은 피를 씻기 위해 매 15분에 한번씩 손을 씻습니다. 세상의 모든 바닷물조차 그 피를 씻어낼 수 없었습니다. 이는 죄의식을 억압한 마음의 영향입니다.

 

나는 아무런 이유없이 건강이 쇠약해지는 한 남자를 그 동생의 부탁으로 상담한 적이 있습니 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했는데, 그는 꼭 헌금통에 돈을 넣을 때마다 그 액수를 다시 채워 넣었습니다. 나는 그에게 돈을 훔친 적이 있는지 물었고, 그는 깜짝 놀라며 부인했지만 결국 인정했습니다. 그는 3천불을 도둑질했고, 그의 행동은 그 죄책감을 억압하기 위한 행동이었습니다. 훔친 돈을 돌려주자 그의 건강은 다시 되돌아왔습니다. 머지 않은 장래에 미국에서, 수 많은 여성들에게서 낙태로 인한 죄책감이 오랜 시간이 지나 표면화될때 얼마나 많은 정신이상을 호소하는 여성들을 우리가 보게 될지 생각해 보십시오. 수 년이 지나면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죄책감은 드러날 것입니다. 당장은 나타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이는 구약성서의 다윗의 경우에서도 매우 명확합니다. 다윗왕은 어느 오후 궁전에서 산책 중 건너편 저택에 있는 밧쎄바를 보게 되어 그녀를 궁으로 불러 정을 통하였고, 그녀는 아이를 가졌습니다. 밧쎄바의 남편 우리야는 전쟁터에 나가 있었는데, 다윗왕은 밧쎄바의 잉태의 원인을 남편에게 돌리기 위해 전쟁터에서 우리야를 불러내 아내에게 가라고 합니다. 그는 전쟁중이라는 이유로 거부했고, 다윗이 그를 만취시킨 상태에서도 가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다윗은 그를 최전방에 배치하여 전사하게 만들었고, 그 후 밧쎄바를 아내로 맞았습니다.

 

다윗은 약 6-7개월 후 예언자 나단이 찾아올 때까지 이에 대한 아무런 죄책감도 가지지 않았습니다. 나단은 다윗왕에게 말했습니다. "어느 가난한 사람이 작은 양 한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옆집에 사는 부자가 이 양을 훔쳐서 자신의 부자 친구들에게 대접했는데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다윗왕은 갑자기 사회정의에 투철해져서는"절대로 있어서는 안될 일이오. 그는 목숨으로 그 댓가를 치르고 훔친 것의 4배로 배상해야 하오!"라고 하였습니다. 나단 예언자는 "그대가 바로 그 사람이오! 당신은 우리야에게서 밧세바를 빼았았소" 라고 합니다.

        

우리가 죄책감을 억압하면, 용서받기 전까지는 영원히 없어지지 않습니다.

 

이때가 다윗이 유명한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로 시작하는 시편 50편(혹은 51편)을 쓴 때입니다. 때로 우리는 우리 안의 부족한 정의(want of justice)를 사회정의에 대한 커다란 사랑으로 은폐할 수 있습니다. 유다스가 시몬의 잔치에서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은 여인에게 "왜 이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않느냐?"라고 합니다. 유다스가 주님을 공격하는 것을 상상할 수 있 습니까?

"나는 산상설교에서 선생님이 가난한 자들은 복되다고 한 것을 들었는데, 제리코와 예루살렘의 길에서 판자집에서 사는 가난한 이들과, 가파르나움의 가난한 어부들을 잊었습니까? 선생님의 가난한 자들에 대한 사랑은 어디로 갔습니까?" 유다스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관심이 있어서 그랬을까요? 아닙니다. 그는 사도들의 공금을 횡령하고 있었고, 그는 이를 사회 정의의 표출로서 은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죄책감을 억압하면, 용서받기 전까지는 영원히 없어지지 않습니다. 용서받으면 죄책 감은 완전히 사라집니다. 주님의 자비와 믿음의 충만함을 통해서 어떻게 우리의 죄가 용서 받습니까? 고해성사를 통해서입니다.


고해성사가 무엇입니까? 영혼의 벌거벗음(nudity)입니다. 모든 핑계와 가식과 게으름과 거짓을 벗어버리고 주님앞에서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양심성찰과 고해성사를 뒤로 밀어놓는 것과 비례해서 동시에 세상에서 신체적인 벌거벗음이 증가하는 사실을 아십니까? 이를 잠시 연구해 봅시다. 아담과 이브가 에덴동산에 있었을때 그들은 벌거벗었으나 수치스러움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몸이 하느님의 은총의 기운(aura of grace)으로 둘러싸여 밝게 빛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죄에 떨어지면서 그들은 은총을 상실했고, 부끄러움을 알게 되어 옷이 필요하게 되었습 니다.

 

이들의 수치가 어떻게 가려졌습니까? 하느님께서 동물의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이를 위해서 1. 하느님께서 손수 무언가를 하셨고, 2. 동물이 죽었으며, 이는 대리적 (代理的, vicariously)으로 이루어졌고, 3. 피가 흘려졌습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하여 전 구약성서를 다 동원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시간관계상 하지는 않겠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그들은 은총을 상실했기 때문에 벌거벗은 상태에서 수치심을 느꼈다 는 것입니다. 지금의 현대 사회는 벌거벗음을 다시 들여오고 있습니다. 이는 갈바리 동산을 오르지 않고서 에덴동산으로 다시 돌아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http://www.banghak.or.kr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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