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글

좋은 글 저무는 이 한해에도

2015.12.13 22:21

벨라뎃다 조회 수:9315

download.jpg




저무는 이 한해에도




노을빛으로 저물어 가는 이 한 해에도

제가 아직 살아서

보고, 듣고, 말하고 생각할 수 있음을

사랑하고, 기도하고, 감사할 수 있음을

들녁의 볏단처럼 엎디어 감사드립니다

 

날마다 새로이 태양이 떠오르듯

오늘은 더욱 새로운 모습으로

제 마음의 하늘에 환히 떠오르시는 주님

 

12월만 남아 있는 한 장의 달력에서

나뭇잎처럼 우수수 떨어져 나가는

시간의 소리들은 쓸쓸하면서도

그립고 애틋한 여운을 남깁니다

 

아쉬움과 후회의 눈물 속에

초조하고 불안하게 서성이기보다는

소중한 옛친구를 대하듯

담담하고 평화로운 미소로

떠나는 한 해와 악수하고 싶습니다

 

색동설빔처럼 곱고 화려했던

새해 첫날의 다짐과 결심들이

많은 부분 퇴색해 버렸음을 인정하며

부끄러운 제 모습을 돌아봅니다

 

청정한 삶을 지향하는 구도자이면서도

제 마음을 갈고 닦는 일에

최선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허영과 교만과 욕심의 때가 낀

제 마음의 창문은 게을리 닦으면서

다른 이의 창문이 더럽다고 비난하며

가까이 가길 꺼려한 위선자였습니다

 

처음에 지녔던 진리에 대한 갈망과

사랑에 대한 열망은

기도의 밑거름이 부족해

타오르지 못한 적이 많았습니다

 

침묵의 어둠 속에서

빛의 언어를 끌어내시는 생명의 주님

 

지난 한 해 동안 당신이 선물로 주신

가족, 친지, 이웃들에게

밝고 부드러운 생명의 말보다는

칙칙하고 거친 죽음의 말을

더 많이 건네고도

제때에 용서를 청하기보다

변명하는 일에 더욱 바빴습니다.

 

제가 말을 할 때마다, 주님

제 안에 고요히 머무시어

해야 할 말과 안해야 할 말을

분별하는 지혜를 주시고

남에 관한 쓸데없는 말로

시간을 낭비하지 않게 하소서

 

참된 사랑만이

세상과 인간을 구원할 수 있음을

당신의 삶 자체로 보여 주신 주님

 

제 일상의 강 기슭에

눈만 뜨면 조약돌처럼 널려 있는

사랑과 봉사의 기회들을 지나쳐 간

저의 나태함과 무관심을 용서하십시오

 

절절한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채

"암울한 시대"탓을 남에게만 돌리고

자신은 의인인 양 착각한

저의 오만함을 용서하십시오

 

전적으로 투신하는 행동적인 사랑보다

앞뒤로 재어보는 관념적인 사랑에 빠져

상처받는 모험을 두려워했습니다

 

사랑하는 방법도 극히 선택적이며

편협한 옹졸함을 버리지 못한 채로

보편적인 인류애를

잘도 부르짖었습니다

 

여기에 다 나열하지 못한

저의 숨은 죄와 잘못들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당신과 이웃으로부터 받은 은혜는

또 얼마나 많습니까?

 

제 작은 머리로는 다 헤아릴 수 없고

제 작은 그릇엔 다 담을 수 없는

무한대이며 무한량의 신이신 주님

 

한 해 동안 걸어온 순례의 길 위에서

동행자가 되어 준 제 이웃들을 기억하며

사람의 고마움과 삶의 아름다움을

처음인 듯 새롭히는

소나무빛 송년이 되게 하소서

 

저무는 이 한 해에도

솔잎처럼 푸르고 향기로운 희망 노래가

제 마음 깊은 곳에서 흘러나와

희망의 새해로 이어지게 하소서

 

- 이해인 수녀님 ’사계절의 기도’중에서 -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240 참된 겸손의 12단계 - 분도 성인- file 2016.09.03 10346
239 명작 속 하느님 (3) 부활 - 레프 톨스토이 file 2016.06.15 11341
238 [영성] 가르멜 성인들의 생애와 영성: 십자가 성 요한의 영성 - 영적 여정이 지닌 세 가지 의미 file 2016.05.31 11873
237 일곱번의 주님의 기도의 약속 (예수 성혈 7기도, 12년기도) file 2016.05.24 28408
236 [기도 배움터] 나는 당신을 축복합니다! 2016.05.14 9179
235 기도, 한 걸음 더 -구약성경의 기도 file 2016.04.21 8612
234 이웃과 사회공동체 file 2016.04.03 9268
233 성모송을 세 번 바치는 기도의 힘 file 2016.03.23 9223
232 부활의 영성 - 부활,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 file 2016.03.20 12833
231 역사 안에 나타난 성모 발현과 메시지 file 2016.02.26 12026
230 어느 한 트라피스트 수도자의 묵상 file 2016.02.08 11177
229 [새로운 유혹과 도전] 개인주의의 유혹과 도전 file 2016.02.01 9927
228 하느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는 마리아, 인류 구원의 길로 file 2016.01.14 9620
227 슈베르트의 아베 마리아(Ave Maria) 2016.01.04 20389
226 회심하는 인간 (영적 합리와 하느님의 뜻) -송봉모 신부님 file 2015.12.29 10564
225 남은 세월이 얼마나 된다고 file 2015.12.20 11031
» 저무는 이 한해에도 file 2015.12.13 9315
223 기도... 마더 데레사 file 2015.12.03 8301
222 성모님께 대한 루이사의 글 ... 카롤로스 신부 피정 강의 file 2015.11.13 9809
221 성인들의 말씀으로 듣는 고해성사 file 2015.11.13 11008
bot_3.p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