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얼굴이십니다.
 
동시통역 : 황실비아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순례자 여러분, 라디오로 메주고리예 방송을 들으며 저희와 함께하고 계신 여러분들에게도 인사 드립니다. 저희는 지금 이 거룩한 곳에서 여러분들에게 인사를 드립니다. 저희는 사순 제 3주간 금요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을 살면서 평화를 갈구 합니다.  기도는 우리에게 왜 이 자리에 모여있는지 그 의미를 부여해 줍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 자리에 모여서 "주님, 저희에게 은총을 부어주시어 저희가 다른 길로 가지 않고 당신의 길로 가도록 해주십시오. 성령을 저희에게 부어주소서, 은총을 부어주소서 ." 하고 기도 합니다. 성령께서는 저희 마음 안에 계십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먼저 회개를 하신 다음에 모든 것을  하느님께 바치고 용서를 청하셨습니다. 우리는 고해 성사를 하면서 이렇게 궁금해 할 때가 있습니다. 내가 모든 것을 말했을까? 하느님께서 나를 모두 용서하셨을까?  나의 모든 죄를 그분께서 용서하신 것이 맞을까?  프란치스코 성인은 동굴로 들어가면서 그 안에서 바로 그 죄가 용서받았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성령의 힘을 받아서 그리고 복음의 정신을 따라 성인은 그 고독의 삶을 살아 나갔던 것 입니다.

 

동굴 안에서 그 체험을 통해서 새로운 은총의 삶을 시작한 것 입니다. 바로 그 체험이 이곳에서 여러분에게도 고해성사를 볼 때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고해 사제께서 사제경을 말씀해 주실 때, 바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죄를 용서하시는 것이고 은총을 주시는 것 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 고해성사 안에서 하느님께서 주시는 모든 은총에 대해서 감사해야 합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보혈과,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그 고난을 통해 우리를 용서해주시고 구원해 주십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축제인이 미사 안으로 합당하게 들어갈 수 있도록 우리의 모든 죄를 반성하도록 합시다.

 

강론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 순례자 여러분, 라디오 메주고리예 청취자 여러분, 저희는 말씀을 두 번이나 들었습니다. 제 1독서 호세아 예언서의 말씀을 들었고, 이 호세아 예언자는 이스라엘에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 했습니다. 사마리아 지역에서 활동했던 예언자 이었습니다. 저는 이렇게 말씀 드리겠습니다. 호세아 예언자는 하느님의 말씀을 통해서 당신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그대로 전해주고 그 방향을 설정해준 예언자라고 말씀 드릴 수 있겠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예언자들은 미래에 일어날 어떤 일에 대해 예언보다는 현대 의사들이 엑스레이를 찍고 건강검진을 해서 여러 가지 점검 끝에 환자들에게 정확한 진단을 내려주는 것처럼  예언자들의 역할도 같았습니다.

 

의사들이 질병의 치료법을 말해주는 것처럼  예언자도 이스라엘 민족들에게 하느님께로 돌아가라는 처방전을 내려줍니다. 호세아 예언자도 마찬가지로 힘있게, 하느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고 계신지 전해주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열정을 가지고  우리를 느끼고 계시는 분, 우리에게 큰 애정을 가지신 분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심장이 우리 인간 때문에 떨린다는 것을 호세아 예언자는 분명히 전달해 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 예언자들은 하느님께서 인간 때문에 고통 받으시거고 사람들이 제대로 된 길을 가지 않기 때문에 힘들어 하시고 마음 아파하신다 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신학을 공부할 때,  여러 종교에 대해서 공부하거나 이집트와 바빌론의 신화에서도 다 마찬가지 입니다. 이러한 신들이 다 인간에 대해 관심이 있다는 것 입니다. 제우스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리스의 신들은 바로 하늘에서 인간들에게 조언을 해주고 인간들에게 있어서 어떠한 연결된 마음이 있다는 것 입니다. 그리스 신화에는 정말 많은 여러 신들이 나옵니다. 화를 내는 신, 인간에게 경고를 하는 신, 그리고 자연을 통해 인간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신, 등등을 볼 수 있습니다. 불을 보내는 신도 있고  체벌을 하는 신들도 있습니다.

 

이러한 신들은 어떻습니까? 바로 이집트와 바빌론에서 얘기하는 신들과 우리 하느님은 다른 존재입니다. 우리의 하느님, 유다인들을 걱정하는 하느님은 우리를 먼저 보고 있습니다. 호세아 예언자가 바로 이러한 것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사야 예언서에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도 하느님께서는 우리 가운데에 오시는 것 입니다. 그리고 우리 중에 한 사람으로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보여주시고 무엇보다 먼저 이세상 끝날 때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다는 것, 우리를 위해 목숨을 내어주실 정도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 우리를 위해서 고통을 감내하신 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이렇게 우리 가까이에 계시는 것 입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있었던 사람들도 하느님께서 가까이 계셨다는 것을 체험하고 그것을 증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가 목말랐을 때, 내가 힘들었을 때에 하느님께서는 제 옆에 계셨다고 진실로 고백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 인들의 하느님, 바로 우리의 하느님 입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모습은 이슬람 교에서 말하는 그러한 신과는 다릅니다. 우리의 하느님께서는 우리 옆에 계십니다. 바로 예수그리스도, 우리의 곁에 계신 우리의 하느님 입니다. 이러한 말씀을 우리는 호새아 예언서를 통해서 들었습니다. 우리는 또 복음에 대해서, 그리고 계명에 대해서 들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마르코 복음의 일부였습니다. 첫째가는 계명이 무엇입니까? 라는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복음서에서 가지고 있었던 은 동전 마지막 한 잎을 봉헌하는 과부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이런 저런 얘기를 하실 때 이 과부를 언급 하셨습니다. 이 과부는 가지고 있었던 마지막 동전을 성전에 봉헌한 것 입니다. 그리고 이 복음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읽을 수 있는 것은 사람들은 여러 가지 생각과 자신만의 의지를 가지고 온 사람들이 있는데 이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가지고 그것을 빌미 삼아 붙잡으려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각자 나름대로의 의도를 가지고 예수님 쪽으로 온 것 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옳은가에 관한 질문, 그리고 이혼에 관한 질문 등등을 합니다.

 

여러분은 루카 복음에 관한 내용을 기억 할 것 입니다. 율법학자가 예수님께로 가까이 와서 가장 큰 계명, 첫째가는 계명이 무엇입니까 라고 질문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때 착한 사마리아인의 예를 들어주십니다. 길을 가고 있는데 강도를 당한 사람이 거의 반 죽음 상태에서 길가에 뻗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랍비는 다른 곳으로 그 사람을 지나 갔습니다. 그러다가 사마리아인이 지나가다가 이 사람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시대에 사마리아인과 유다인은 서로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유다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이방인이라 하면서 무시했습니다.

 

Immagine di Medjugorje

 

그러나 이 사마리아 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 사마리아인은 강도에게 당한 이 사람에게 다가가서 그 사람의 상처를 낮게 해줍니다. 그리고 목마른 이 사람에게 마실 것을 주고 여관에 데려가 여관주인에게 이 사람을 돌보아 달라고 합니다. 그리고 가진 돈을 주면서 돈이 더 필요하다면 제가 돌아오는 길에 더 드리겠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착한 사마리아 인의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또 이 복음에서는 첫째가는 계명이 무엇입니까? 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하십니다.  "이스라엘아,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넌 마음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목숨을 다해 주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너의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랑으로 이웃을 대하고 하느님을 대하여야 한다는 것 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얼굴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바라보고 계시는 하느님의 얼굴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또 두 번째는 너희 이웃을 너의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라고 말씀 하십니다. 우리는 성경 말씀을 보면 하느님께서 당신 모상으로 우리를 창조 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느님을 반영하는 존재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안에는 하느님의 이미지가 들어 있습니다. 하느님의 모습, 하느님의 그 모습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 이웃을 무시하고 없앤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것 입니다.

 

사람들은 미움의 법을 따를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미움의 법이 아니라 사랑의 법칙, 조화의 법칙을 따라야 하겠습니다. 얼마 전 크로아티아 국경 방송에서 물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방영 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물을 마십니다. 그런데 우리 각자는 우리의 몸의 대부분이 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 다큐멘터리 에서 한 일본 작가가 나왔습니다. 거기에서 물 두 잔이 등장 합니다.

 

한 물잔에겐 사랑한다 말하고 적어놓고, 한 물잔에겐 너는 바보다 라고 적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사랑한다 라고 적어놓았던 잔에 있던 물의 크리스탈이 정말 눈의 결정체처럼 깨끗하고 아름다웠다고 합니다. 그러나 너는 바보다 라고 적어 놓았던 물의 결정체는 그렇게 깨끗하고 아름답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현미경으로 봤을 때 창조물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볼 수 있었습니다. 똑 같은 물잔이었지만 한 물잔은 조화, 그리고 사랑을 뜻합니다. 그러나 너는 바보다 라고 적은 물의 결정체를 현미경으로 보았을 때 그 결정체는 엉망이었습니다. 제대로 된 질서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궁금해 합니다. 나쁜 말을 했을 때, 불경스러운 말을 했을 때, 만들어 내는 무질서는 어느 정도인가 하고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핸드폰을 사용하고 매우 큰 소리를 대화를 합니다. 그리고 집이 흔들릴 정도로 화를 내고 소리를 칩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그 나쁜 단어, 저주스러운 단어, 불경스러운 말을 했을 때 혼란이 일어나고 무질서가 일어납니다. 하느님께서 만드신 그 조화 안에 여러분은 무질서를 만드는 것 입니다. 우리는 가정 생활 안에서 이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아이들에게 소리를 지르고 나쁜 말을 했을 때 아이들은 겁에 질립니다.

 

비유를 들겠습니다. 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짐을 엉망으로 만드는 소년 이었습니다. 엄마가 그 아이를 집밖으로 내보냅니다 그러면서 지팡이를 가져오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꼬마는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꼬마가 돌아왔을 때 돌을 들고 왔습니다. 엄마가 그 꼬마에게 지팡이는 어디 있니 라고 묻자 그 꼬마는 못 찾았어요. 여기에 돌이 있습니다. 여기엔 돌이 많습니다. 돌도 지팡이만큼 아파요 그러니까 돌을 쓰세요 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엄마는 울면서 돌을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습니다. 악은 절대로 사람들을 옳게 만들어 주지 않습니다. 하느님처럼 사랑만이 사람을 올바르게 교정시켜 줍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제가 말씀 드렸던 것처럼 우리는 하느님의 딸과 아들들 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철학이라는 것이 이러한 때에 시작됩니다. 라는 사람이 얘기한 것처럼 우리는 내가 말 하는 대로 이루어 지는 것 입니다. 누군가 날 원한다. 난 사랑 받기 때문에 존재한다. 이 철학자가 말한 것처럼 그것이 사실 입니다. 내가 사랑 받기 때문에 존재한다.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존재 하는 것 입니다. 50년 전에 모범에 대해서 그리고 흑인에 대해서 말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여러분에게 해를 끼칠 수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여러분들이 국경을 넘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어떤 사람들이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 들이 이러한 혜택을 받지 못하더라도 여러분들은 하느님 눈에 위대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특별한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하라고 했습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그 당시에도 그러하셨던 것처럼 지금도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복음이 말해주는 것처럼 아무도 예수님께 다른 질문을 드리지 못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냐하면 그 사람들은 이미 인지했기 때문 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들이 이미 당신의 죽음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마음의 불편함이 없으셨고 그 상황 안에서 과장하거나 불안해하지 않으시고 평화를 잃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 당신 아버지께 의지하고 기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닻이 되셔야 하고 하느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셔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도 행복해 질 것 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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