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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시대 순교자들의 성모 신심

 

여진천 신부


성모님은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여 구세주를 낳으셨고, 일생을 통하여 하느님의 뜻을 온전히 듣고 그대로 실천하셨습니다. 성모님을 공경하며 성모님을 닮아가려는 노력은 한국 초기 교회때부터 오늘날까지 계속 되고 있습니다. 짧은 지면속에 박해시대 순교자 및 신앙 선조들의 성모 신심을 모두 담아낼 수는 없지만, 구체적인 몇몇 기록들을 통해 이들의 성모님께 향했던 흔적들을 더듬어 보고자 합니다.

 

1791년에 전주에서 순교한 권상연 야고보는 윤지층 바오로와 함께 참수형장으로 끌려가면서, 맞은 매로 몸을 가누지도 못하면서도 ‘예수, 마리아’를 부르며 즐거운 표정을 지었고, 둘러서있던 이들에게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설교를 하였습니다. 이처럼 순교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성모님을 부르며 살았고, 마지막 순간에도 이렇게 의탁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성모님에 대한 공경의 구체적인 신심행위로 묵주기도를 자주 바쳤습니다. 이때 구경꾼들이 “참 이상한 일이군, 죽는 것이 좋아서 노래를 부르면서 형장으로 가는군.” 이에 그는 “그건 오늘 하느님 곁으로 가서 끝없는 복을 누리게 되겠기 때문이요.” 라고 말하였습니다. 형장에서 그는 “기도를 마치지 못했으니 조금만 기다려 주시오.” 라고 말하면서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기도를 마친 후 침착하게 그의 제헌을 완성하여 주는 칼날을 받았습니다.

 

묵주기도와 함께 1850년대의 신자들에게는 성물과 성화가 신앙생활을 중요한 수단 이었습니다. 최양업 토마스 신부는 스승 신부에게 보낸 서한(1850.10, 1857.9)에서 “신자들은 성물을 갖고 싶어하는 욕망이 불같습니다. 상본이나 고상이나 성패를 장만하기 위해서는 아끼는 것이 없습니다. 성물을 장만하기 위해서는 생존에 꼭 필요한 전재산을 나누는 한이 있더라도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선뜻 내놓습니다. ... 교우들의 눈에 점잖게 보이며 될 수 있는 대로 얇은 종이에 색채없이 잘 그린 조금 큰 상본을 보내주십시오. 성모님 상본을 많이 보내주시고 다른 성인들의 상본은 조금씩 보내주십시오. ... 또 작은 십자가와 성패 등을 보내주시되 묵주는 보내시지 마십시오. 묵주는 조선 교우들도 아주 잘 만듭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당시 신자들은 묵주를 만들어가며 이 기도를 즐겨 바쳤던 것입니다. 또한 신자들은 중국으로부터 전해진 한문 서학서들과 한글로 번역 필사된 성모님에 관한 서적들을 탐독하였습니다. 책들은 ‘묵주신공’, ‘묵주신공 규정’, ‘성모괴’, ‘성모 매괴경’, ‘성모념주 묵상’, ‘성모성월’, ‘성모경’ 등 이었고 이러한 책들은 널리 읽혀졌습니다.


당시 성모 신심에 관한 단체가 생겨났습니다. ‘성모성심회’는 1836년 프랑스에서 창설된 신심단체로 성모성심을 특별히 공경하고, 성모성심의 전구를 통하여 죄인들의 회개를 하느님께 간구하였습니다. 우리나라의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 신부는 신학생 시절 스승 리브와(Libois)신부와 함께 이 ‘성모성심회’애 가입하기를 원하였습니다. 리브와 신부는 1843년 6월에 쓴 편지에서 “그의 덕행과 재능으로 조선에 큰 희망이 되고있는 조선인 학생으로 이름은 최양업입니다. 각자의 입회 허가서를 외방선교회 신학교 지도자들을 통하여 제게 보내주십시오.” 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다블뤼(Daveluy) 신부는 그동안 성모로부터 받은 은혜에 감사하고자 파리에 본부를 둔 성모성심회에 가입하기로 결정하고, 1846년 11월 공주 수리치골에서 ‘성모성심회’를 조직하였습니다. 이 ‘성모성심회’는 널리 보급되어 박해 속에서 살아가는 교우들의 신앙생활에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1831년 조선교구가 설정되었어도 북경교구의 주보이신 ‘성 요셉’을 모셔왔는데 제 2대 조선 교구장 앵베르(Imbert) 주교는 1838년 12월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를 조선교회의 수호자로 정해줄 것을 교황청에 요청하였습니다. 이에 북경교구 주보성인이신 ‘성 요셉’과 함께 모신다는 조건으로 이 요청을 승인하였습니다. 1861년 베르뇌 주교는 조선 교구를 8개 구역으로 나누면서 그 중 7개 구역을 성모 축일과 관련된 명칭으로 불렀습니다. 후일 1954년 성모의 원죄없으신 잉태 교리 선포 100주년을 맞아 비오 12세는 성모성년을 선포하였는데, 이 때 한국교회는 1954년 10월 10일 서울에서 3만명의 신자가 모인 가운데 한국교회를 성모님께 봉헌하였습니다.

 

이와같이 한국교회의 신자들은 초기부터 성모님에 대한 신심을 갖고 실천하였습니다. 묵주를 만들어 가며 묵주기도를 바쳤고, 일상에서처럼 마지막 순간에도 성모님의 이름을 부르며 그분께 의탁하였습니다. 신심의 증진을 위해 성모님에 관한 책을 읽고 필사해 나누었으며, 신심단체에 가입하기도 하였습니다. 더불어 교회 차원에서도 성모님을 한국교회의 수호자로 모시면서, 한국교회를 성모님께 봉헌하기도 하였습니다. 순교자들의 후손인 우리도 순교자들처럼 성모님을 공경하며, 성모님을 닮아가는 신앙인이었으면 합니다.


< 2001년 9월 평화의 모후 선교회 발행 '메주고리예' 제9호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