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jpg

 

메주고리예에 간다고 무엇이 달라질까?

 

                                             
                                                                                                                                                                                                                                       -  순례자 이마리아-

 

  50살을 바라보는 나이에 지나온 세월을 뒤돌아 보니 어떻게 살아왔나 하는 마음에 새삼스럽게 눈물만 납니다. 하늘아래 머리를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 중 가슴 아픈 사연이 없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마는 너무나 힘들었고 가슴 아픈 사연의 연속이었던 저의 지나온 삶은 15살 때 7남매를 두고 어머니가 가슴에 한을 품으신 채 돌아가실 때부터 아니, 그런 결과를 만든 아버지와 한 여인이 무책임한 행동에서 시작이 되었습니다. 오갈 데 없는 모녀를 집에 받아 들이고 딸 처럼 거두어 주던 엄마는 돌보아 주던 어린 사람에게 남편을 빼앗긴 채 몇 년 동안을 서로 자식을 낳아가며 한 집에 섞여 살아야  했습니다.  엄마는 7남매를 기르면서도 자식들한테 고함 한번 쳐 보지 못하시는 무남독녀 외동딸로 곱게만 자란 분이셨습니다.  사랑하는 남편과 자식같이 돌보던 사람에게 배신당하고 경제력마저 없어진 엄마는 오직 어린 자식들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각박한 현실속에 짓눌려야 했습니다나는 자기를 배신한 사람들에게 말 할 수 없는 상처를 받으면서도 알고도 모르는 척, 보고도 못본척하며 한 지붕 밑에 두 집 살림을 살아야 했던 엄마가 너무나 원망스러웠습니다.  그러나 내가 결혼을 해서 자식을 낳고 살아보니 엄마의 고통이 어떤 것인지 지금도 엄마의 고통스러웠던 삶을 생각하면 눈물만 납니다

 

 

한 여자로서 남편을 뺐기고 받은 배신과 상처로  밤마다 남모르게 흘리는 눈물과 고통으로 밤을 새면서도 엄마의 가슴은 새카맣게 피멍이 들어 버렸지만 낮이면 마치 아무것도 모르는척 태연하게 지내야 했습니다. 외할머니는 금지옥엽으로 키운 외동 딸이 자식 같은 사람앞에서 매를 맞기도 하며 비참하게 살아가는 것을 보다 못해 홧병을 얻어 돌아가셨습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엄마는 더욱 더 불행한 여인이 되었습니다.  새엄마와 함께 들어온 또 한 분의 외할머니는 우리 가족에게는 큰 시련의 연속을 제공한 분이 되었습니다.  아버지와 살고 있던 집을 몰래 팔고 젖먹이가 있는 엄마와 우리만 남겨둔 채 새엄마와 함께 떠나 버렸을 때에는 앞날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감마저 느낀 엄마는 울지도 못하셨습니다. 엄마는 간신히 아버지가 살고 계신 집을 찾아가 도움을 청했으나 새엄마로부터 문전박대를 당하고 돌아와야 했습니다. 그날 밤 엄마는 밤새도록 울면서 제게 이렇게 말해 주었습니다. 자식들과 살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엄마의 말에 새엄마는 “ 나도 젊은 나이에 먹고 살아야 한다.” 고 하며 도움을 청하는 엄마를 차갑게 거절했다는 것입니다.  그 후 팔린 집에서 쫒겨나 잠잘 곳 마저 없어 쓰러져가는 천막집에서 가마니를 깔며 젖먹이를 데리고 습기차고 바람부는 곳에서 살면서 산후조리 조차 못하고 고통을 당하던 엄마는 결국 몸과 마음에 병이 걸려서 약도 제대로 못써보는 몇 년의 병치레를 하면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의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jpg

 

남은 자식들은 개밥의 도토리가 될텐데...

 

남은 자식들은 개밥의 도토리가 될텐데... 라고 하늘만 쳐다보고 울던 엄마는 39살의 젊은 나이에 뼈만 앙상한 모습으로 군대 가 있던 큰오빠를 그리워하다 눈도 못 감고 세상을 떠나야 했습니다. 소아마비를 앓고 있던 셋째아들과 이제 막 젖을 뗀 막내를 생각하면 어떻게 눈을 감고 죽을 수가 있었을까요?  병에 시달리며 고통을 받으면서도 자식 곁에 남고 싶어 했던 엄마는 아버지와 새엄마와 한 방을 쓰면서 겪는 고통으로 자살하려고 벽속에 수면제를 모으고 계신 것을 찾아낸 적이 몇 번인지 모릅니다. 위로 오빠가 둘 있지만 세 딸 중 맏딸이었던 저는 엄마의 고통과 한 많은 세월을 옆에서 지켜보며 같이 울면서 살았기 때문에 나를 고명딸이라고 부르시며 끔찍하게 사랑해 주시는 아버지를 한없이 미워하고 저주하며 그 사랑을 차갑게 거부하며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나는 아버지에게 말대꾸 한 번 못하고 사는 불쌍한 엄마가 야속하고 바보 같아 보였습니다.  그런 엄마의 가슴에 배신이라는 비수를 꽂고 39살 나이에 자식을 두고 눈도 못 감고 세상을 떠나게 하고 우리 7남매의 일생을 비극의 어두움으로 몰아넣은 아버지와 새엄마를 용서해야 한다는 것은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피는 못 속인다고 그래도 나의 아버지 이기에 돌아가신 엄마에 대한 그리움과 함께 미워하면서도 표현하고 싶지 않은 아버지에 대한 사랑 때문에 한없이 눈물을 흘리며 살아가야 하는 메마른 여인이 되었습니다

 

차라리 엄마가 돌아가신 다음에 (그런 일도 없었겠지만) 우리 입에 들어왔다면 한평생 고마운 마음으로 잘 모실 수 있었던 새엄마도 한편으로는 불쌍한 마음이 들어서 이제는 다 잊어버리고 잘해 보자구 하면서도 어린 남동생과 여동생들 사이에서 동생도 누나도, 언니도 아닌 15살짜리 엄마가 되어야만 했습니다. 더구나 새엄마와 할머니 그리고 새엄마의 두 아이들 틈에서 이리 저리 채이며 인격이 없는 사람으로 희생되어 버리는 동생들을 보며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습니다.  동생들이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자 밥 색깔이 다른 도시락을 보고 저는 울면서 아버지에게 대들고 새엄마와 할머니에게 이 죄를 어떻게 받으려고 이러느냐고 울고 불고 하였지만 모든 것은  어린 제 능력 밖에서 일어나는 일이었습니다.  양심없는 어른들이 저지르는 죄를 심판하기에는 나이 어린 저의 반응은 너무나 미약했습니다. 이러한 현실을 인정할 수 없어서 반항하면서도 나의 마음은 지쳐서 너무나 힘들고 외로운 이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을 뿐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아무것도 생각해 보지 않고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리고 행복을 찾아서 사랑이라는 품속에서 시간의 제한조차 받지 않고 쉬고 싶었습니다. 무조건적이고 맹목적인 사랑을 했습니다

 

 

그러나 누구의 탓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 사람은 나를 너무나 힘들고 지치게 만들었습니다. 나는 하느님을 원망하며 울었습니다. 하느님, 당신은 정말 계시는 분이십니까? 제가 무엇을 얼마나 큰 죄를 저질렀기에 이렇게 감당키 어려운 시련만을 주시는지요? 저는 행복하게 살아 볼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까? 정말 이렇게 하셔야만 하나요.... 당신은 저에게 너무나 무자비한 분이십니다. 그렇게 시련을 겪고 있을 때 성모님께서는 저를 불쌍히 여기시고 그대로 두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하셨는지 제동생을 통해서 주님이 계심을 알게 해 주시고 기도도 할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그때 구로동 본당에 계시던 종효 신부님은 저희 가정을 신앙으로 인도해 주시고 기도해 주셨습니다. 남편과 저 그리고 딸아이까지 온 가족이 영세를 받았고 자연유산으로 임신이 안되던 저는 기적적으로 아들을 낳을 수 있는 은혜를 받고 아오스팅이라는 이름으로 봉헌했습니다. 영세를 받은 후 구역장의 임무를 수행하며 여러가정의 어려움을 보면서 저의 아픔을 기도 속에 묻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짧은 신앙생활로 나의 상처들을 잊기에는 미움과 증오의 뿌리들은 너무나 깊이 박혀있었나 봅니다.  

 

 

사랑을 갈구하면서도 사랑을 모르고 살아 온 저는 어느새 마음이 다시 굳어져 결국은 20년의 차가운 냉담생활로 되돌아가서 제 마음속에서 스스로 제일 불쌍하고 가슴 아픈 인생의 주인공이 되어 버렸습니다. ? 나만 이렇게 힘든 십자가를 지면서 살아야 합니까?” 하며 다시 하느님을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고통 속에 살아가는 동생들과 오빠를 보면서 서로 감싸주고 이해하고 사랑을 베풀며 감사하는 행복을 조금이라도 누릴 수 있도록 그렇게 살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애원하며 기도했습니다. 너무나 힘들 때는 신앙이라는 것이 사치스럽게 생각될 때도 있었습니다 가까운 듯 하면서도 멀게만 느껴지는 하느님의 사랑과 품에 꼭 안아주실 것만 같은 성모님의 손길이 너무나 그리웠습니다. 그리고 시련이 올 때마다 좌절감에 혼자 울고 지낸 적도 많았고 세속 친구들과 어울려 모든 것을 잊어보려고도 했으나 제 가슴속의 허전함은 더욱 더 저를 외롭게 만들었습니다

 

 

599.jpg

 

메주고리예에 간들 무엇이 달라질까

 

 

그러던 어느 날, 미국에 살고 있는 여동생이 미국에 와서 메주고리예를 갔다 오면 떻겠느냐고 연락이 왔습니다. 처음에는  메주고리예에 간들 무엇이 달라질까? 하는 마음이었으나 왠지 가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미국에 도착하니까 동생은 메주고리예에서 있었던 일들을 진지하게 말해 주었습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왔지만 알게 모르게 받아 왔던 마음의 상처들이 성모님의 사랑을 느꼈을 때, 모두 치유되었고, 육신의 엄마는 안계셔도 천상의 엄마인 성모님은 무한하신 사랑을 부족함 없이 주고 계셨는데 오직 본인이 몰랐을뿐임을 알게 되었다고 하며 메주고리예 8 9일을 울면서 지내다 왔다고 했습니다. 그 눈물은 예전의 눈물처럼 슬픔과 외로움의 눈물이 아니라 기쁨과 감사의 눈물이었으며, 자신이 영혼이 다시 살아나는 치유의 시간이었다고 말했습니다.  돌아가신 엄마가 보고는 싶지만 자신이 엄마 없이 살아왔다는 생각은 전혀 안드는 것이 신기하기만 하다고 하며 내가 너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안다면 너희는 기쁨의 눈물을 흘릴 것이라는 성모님의 메시지를 말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동생들을 보살피면서 몇 배나 더 큰 마음의 상처를 가지고 살고 있는 언니를 치유시켜 주시어 남은 시간들을 행복하게 살게 해달라고 울면서 성모님께 기도드렸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저는 속으로 큰일났구나. 이 사람들이 제 정신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했지만 이미 미국에 와 있는 저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밤늦게 도착한 첫 날, 성당에 들려서 성모님께 인사 드리고 짐을 푼 후 잠이 들었습니다.  이른 새벽 몇 시쯤 되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설명할 수 없는 누군가가 저를 부르는 것 같은 강한 힘에 이끌려 무조건 뛰쳐나갔습니다. 속으로는 영어도 못하고 돈도 없는데 이러다 길을 잃어 버리면 어떻하나... 걱정이 되었지만 마음과는 달리 내 몸은 어디를 향해 무조건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어두운 새벽길을 달리면서 이곳이 어디인지 알수는 없지만 성모님께서 나를 혼자 두지 않으실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가다 보니 저 멀리 사람들이 보였습니다. 그쪽에서도 저를 향해 오고 있었는데 그분들의 목에 걸린 스카프를 보고 같은 순례팀 임을 알고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릅니다. 저에게 발현산이 어디냐고 물으시길래 나는 지금이 몇시이며 이곳이 어디쯤인지도 모른다고 하였더니 지금은 새벽 3인데 아무것도 모르면서 이 어두운 새벽에 겁도 없이 어디를 가느냐고 하며 오히려 나를 걱정해 주었습니다.  길에서 우연히 만난 예수님 같은 할아버지의 안내를 받으며 일행과 함께 비온 뒤의 발현산을 넘어지고 엎어지고 하면서 올라갔습니다

 

동생의 작은 신발을 신고 왔기 때문에 발이 짓무르고 아팠으나 마음은 한 없이 편하고 기뻤습니다. 그 후로도 짓물러져 디딜 수 없을 만큼 아픈 발로 십자가산과 발현산을 오르내리며 평생을 무겁다고 울면서 지고 온 나의 십자가가 너무나 단순하고 가벼운 십자가였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재활원 청소년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 아이들이 지난 과거를 모두 잊어버리고 앞으로는 주님과 성모님의 배려하심으로 절대로 또 넘어지는 일없이 잘 살아주기를 두 손 모아 빌었습니다. 오아시스 수도원의 예수님을 보면서 그분의 고통에 무관심했던 저의 이기심을 뉘우치며 많이 울었습니다 메주고리예를 찾아오는 순례객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성모님의 말씀을 전하고자 애쓰는 목격증인 비스카를 보면서 많은 감동을 받았고 요조신부님의 안수를 받은 후 평화를 맘껏 느끼며 편안히 쉴 수 있는 은혜도 체험했습니다메주고리예에 있는 동안 미국 비자를 못받아 혼자 집에 있는 남편을 생각하며 성모님, 저의 남편 요셉도 이곳에 불러주시어 우리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알게 해 주시고 세속 생활에만 열중하지 말고 가족을 생각하며 십자가의 예수님께 기도 드릴 수 있는 남편이 되도록 도와주세요.라고 열심히 기도 드렸습니다.  

 

 

며칠 후, 한국의 남편에게 전화를 하니 여보, 나 비자 나왔어. 하는 소리를 들으며 불러주시는 성모님께 감사드렸습니다.  새벽 길에서 만난 자매님들과 즐거웠던 시간, 안상익, 류해욱 신부님의 깊으신 배려로 새로운 세상을 보고 믿게 된 뜻 깊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 후 뉴욕에 온 남편과 함께 동생부부의 배려로 퀸즈성당에서 주관하는 기초 성령세미나를 갔는데, 그곳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은혜를 체험했고 남편도 나도 한없는 눈물을 부끄러운 줄 모르고 흘렸습니다. 그리고 그 시간을 통하여 남편과 저는 지난 날의 잘못을 뉘우치며 마음 깊이 뿌리내린 불신과 미움의 뿌리를 없앨 수 있었습니다. 주님과 성모님이 아니시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 후 남편과 함께 메주고리예 순례를 또 가게 되었습니다. 지도신부님이셨던 임언기 신부님, 김기수 신부님의 영적 말씀과 겸손하신 사랑으로 우리 자신이 주님의 사랑 받는 딸과 아들임을 알았습니다. 십자가산과 발현산을 오르내리며 변화되어가는 남편을 보면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사를 드렸습니다. 순례일정중 치유예절 때 임언기 신부님, 김기수 신부님의 안수를 받고 앞으로 남은 우리들의 생애를 성모님과 주님의 말씀을 전하며 살겠다고 다짐도 할 수 있었습니다

 

 

4545.jpg

 

태양속에서 성모님께서 저를 보고 활짝 웃고 계셨습니다! 

 

 

 어느 날 오후 3시쯤 십자가산에서 그곳에 있는 12처 앞에서 성모님, 저도 다른 순례자들처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행복한 미소를 가질 수 있게 해 주세요.하고 기도드리며 지나던 중에 왠지 태양을 바라 보고 싶다는 생각에 고개를 들어 태양을 보니 태양이 아름다운 색을 사방에 뿌리며 빙빙 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태양속에서 성모님께서 저를 보고 활짝 웃고 계셨습니다! 성모님께서 웃는 모습을 바라보며 나도 모르게 같이 웃었습니다. 나도 한 점 티도 없는 밝고 행복한 마음으로  웃을수 있음에 마음 깊이 평화가 담겨졌습니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하루 2갑의 줄담배를 피우던 남편이 담배를 끊고, 더욱 놀라운 것은 새벽이면 일어나 묵주15단을 바치면서 낮에도 묵주를 손에 꼭 잡고 다니는 것이었습니다.  옛날 레지오 단원이었을 때, 회합때 하는 묵주기도가 길고 지루해서 묵주기도가 끝날 즈음에 마지못해서 들어가던 남편이, 대중가요는 가수처럼 불러도 미사때 하는 성가는 꿀먹은 벙어리 같았던 남편이, 주여, 임하소서를 시도 때도 없이 부르고 종이에 쓰며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나의 마음 속에는 얼마나 갈까? 하는 불신의 잔뿌리가 남아 있었는데 새벽 6시 반 미사를 하루도 빠지지 않고 나가며 성모님께 의탁하여 예수님께 더욱 가까이 가고자 하는 남편이 정말 너무나 사랑스럽고 고마울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내 대신 죄를 지시고 나의 죄를 용서해 주셨듯이 나도 이제는 세속생활에 빠져 정신 없이 살아왔던 남편이 열심히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서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 자신부터 용서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고 아버지도 용서하며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미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그런 상처 속에서 보낸 지난 시간들이 안타까울 뿐이었고 나는 더 이상 불행한 여인이 아니라는 확신을 마음 깊이 갖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해결 될 수 없는 현실의 문제를 갖고 가슴 아파하며 울고 사는 지를 알게 되니 용서하면 잊어버릴 수 있는 지난 옛날의 과거에 얽매어 가슴앓이를 하며 살아왔던 제 자신이 바보같은 여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아픔과 시련의 시간들이 저를 주님과 성모님께 인도해 준 것이라면 비록 지난 시간들이지만 내 삶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고 사랑하겠노라는 마음이 듭니다

 

이제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동생이 말하는 성모님의 사랑과 말씀을…  사랑하는 동생부부에게 표현할 수 없는 고마움을 전하고 싶습니다. 새벽 길에서 만난 분다, 수산나 자매님과 모든 형제 자매님들, 주님이 주시는 사명이 아니면 도저히 할 수 없는 봉사를 하고 계시는 성령세미나 봉사자님들, 김인성 신부님과 모든 분들께 깊이 감사 드리며 저희가 어디서 살아가든지 받은 은혜를 이웃에게 전하며 주님과 성모님을 위해 평생을 바치기로 약속합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성모님과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기에 이제는 지난 과거를 다 버리는 마음으로 이 글을 썼습니다. 나의 기억 속에 있는 모든 분들에게도 예수님과 성모님의 은혜가 함께 하시어 기쁨과 은혜 가운데 생활하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 2001년  평화의 모후 선교회 발행  '메주고리예' 소식지 제8호 나눔터에서 >

 

 

437463.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