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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문턱에서 어느 젊은 사제의 마지막 편지

  

   "너는 멜치체덱과 같이 영원한 사제다." (시편110, 4)

 

1998년에 세상을 떠난 헤수스 무뇨스 신부가 최근 아빌라의 십자가의 요한 축일에 톨레도 신학교에서 중견 사제들의 피정주제로 선택되었다. 그들은 1990 사제 수품을 받은 헤수스 신부가 생존해 있었다면 은경축을 그들과 함께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톨레도 교구 소속 사제 헤수스 무뇨스 신부는 스페인 꼬리아에서 1998 9 7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서른 살이었다. 죽기 직전 그는 편지를 썼다. 편지는 지금까지 널리 읽혀졌고, 오늘까지 "많은 좋은 열매" 맺고 있다고 그의 신학교 동창생이며 임종을 지켜본 호세 마리아 알시나 신부는 말했다. "나는 그가 진료를 받기 위해 마련한 팜플로나의 그의 집으로 찾아가 그를 만났습니다. 그는 병으로 매우 쇠약해져 있었으나 나는 안에서 사랑을,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된 사제의 넘치는 사랑을 보았습니다." 라고 그는 말했다.

 

이것은 무렵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들의 공통적인 느낌이었다. "나는 그의 생애의 마지막 2년간 그를 지켜보는 행운을 얻었습니다." 라고 헤수스 신부의 동생 하비에르의 친구 가브리엘은 말했다. "그의 고통, 그의 아픔, 그의 죽음은 그를 알던 사람들에게 희망이었고 도움이 되어 주었습니다. 그의 증언은 남아 있는 우리들의 삶을 위해 획을 그었으며 우리들은 그를 잊을 없습니다." 말했다.

 

헤수스 무뇨스의 마지막 메시지는 계속적으로 영적혜택을 낳고 있습니다. "어제 나는 기도 중에 다시 그것을 읽었습니다." 라며 알시나 신부는 설명했다. "그리고 나는 헤수스 무뇨스에게 주신 사제직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 드렸습니다. 나는 그가 천국에서 우리들이 참된 사제의 길을 걸을 있도록 전구하여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젊은이들이 그리스도의 사제직의 부르심에 계속 응답하도록 전구하여 것을 요청했습니다. 이러한 지향으로 나는 헤수스 무뇨스 신부가 죽기 직전 마지막으로 편지를 다시 공개합니다


 

" 먼저 자신을 소개함을 허락하여 주십시오. 내이름은 헤수스 무뇨스이며 서른 살의 스페인 톨레도 교구의 가톨릭 신부입니다. 1996년에 나는 남미 볼리비아에서 교리 공동체의 이동 교리 선교직을 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휴식 휴가차 스페인으로 돌아 건강진단을 받았는데 , 나는 병원에서 직장암이라는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나는 즉시 가지 수술을 받았습니다. 의사들은 항문과 직장을 절단했고, 결장을 30센티나 절단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나에게 인공 항문을 달아주었습니다. , 의사들은 간의 4분의 1 제거했습니다. 그리고 연결된 가지 작은 수술도 했습니다. 나는 방사선 치료도 받았고, 현재는 항암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몸은 매일 악화돼 갔고, 지금은 여행을 없으며, 집을 떠날 수도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현재  육체의 상황은 하루 하루 악화되고 있는 상태입니다. 결코 같은 상태에서 지속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내일 아침은 어떨지 예상할 없습니다. 그것은 미스테리입니다. 고통을 받는다는 것은 오직 믿음의 관점에서 오는 환상의 신비입니다


볼리비아에서 지낸 나의 시간은 멋진 시간들이었습니다. 나는 어릴 적부터 항상 선교의 꿈을 가지고 있었으며, 주님께서는 그것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사제의 쇄신의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나는 소위 "브르주아"근성의 속물적인 중산층 계급이었습니다. 나는 자신 외에는 아무 것도 관계하지 않았습니다. 나의 육적인 쾌락에 많은 관심을 가졌으며, 주님과 가까운 관계없이, 또는 주님의 말씀에 관계없는, 기도하지 않는, 거룩하지 못한 신부였습니다. 전례에 대한 관심도, 내가 보살펴 주어야 하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도 없었습니다. 나에게는 누구를 위해 죽을 있는 사랑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눈에는 내가 열심히 일하는 사제, 모든 일에 관심을 갖고 있는 겸손하고, 착한 목자로 보였나 봅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거짓이었습니다. 나는 이기적이고, 교만하며, 내가 하고 있는 자신의 일에만 집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작은 마을에서 주어진 일만 하고, 복음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일에는 별로 흥미가 없었습니다. 돈에 집착하기 시작한 나는 볼리비아를 떠나기 전까지 상당한 보수를 지불하는 초등학교에서 어린이들을 가르쳤습니다. 사제에게 그리고 어떤 그리스도교 인들에게도 가장 위험은 돈입니다. "돈은 모든 악의 뿌리니까요." (1디모, 6, 10)

 

그러나 나는 복음의 기적을 보았습니다. 무엇보다 나의 복음전파 팀의 형제 자매들이 나를 참으로 많이 도와주었습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들은 나를 조금씩 변화시켜 주었습니다. 언제나 사랑스럽게, 아니, 그보다 복음의 사랑으로. 내가 항상 그들의 충언을 고맙게 받아 드렸던 것은 아닙니다. 어릴 내가 받은 교육은 언제나 내가 일등이 되어야 하는 자만심으로 나를 형성시켰으며, 사제가 되어서는 언제나 리더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진실로 친구들에게 나는 정말 감사합니다. 마치 신학교에 번째 입학하는 같았습니다. 사제의 새로운 탄생. 간단히 말하자면, 나는 내가 원치도 않던 수치의 문으로 다시 들어가야 했던 것입니다. 나는 안에 숨겨져 전에 보이지 않던 죄를 분명히 똑똑히 보았습니다.


나는 하느님께 기도했습니다. 내가 복음전파의 장애물은 아니었는지, 사람들이 이미 가지고 있던 문제들에 있어 선교직이라는 것이 짐이 것은 아닌지, 그렇다면 나를 거기서 제거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 물론! 주님께서 기도를 들어주셨고 말고요! 주님께서는 내가 마음을 다해 바치는 간절한 기도는 언제나 들어 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언제나 상처받고 고통받는 사람들의 기도를 몸을 굽혀 들어 주십니다. 그분께서는 잃어버린 양을 부드러운 자비로 보듬어 주십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베풀어 주십니다. 그분은 힘없는 사람을 혼자 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사람들이 스스로 닫아 버리는 문을 언제나 바로 열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생명에서 죽음으로 건너가는 다리가 고통입니다. 고통은 하나의 설명할 없는 신비입니다. 신비로운 일입니다수술 직후, 나는 모르핀으로 통증 억제의 진정 상태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번은 특별히 생생한 기억이 났습니다. 내가 깨어 났을 나는 앞에 십자가를 보았습니다. 나는 거기 매달린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우리는 서로 닮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분도 나도 몸은 상처 투성이며, 같은 처지에 있다는 것을 그분께 말씀 드렸습니다. 우리의 뼈는 드러나고, 홀로 버려진 고통을 받으며, 십자가에 박혀 버려졌다는 생각... 나는 격렬히 부르짖었습니다. 나는 이해할 없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버리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분께서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동시에 나는 투덜거릴 입장이 아니라는 결론에 동의했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나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하늘로부터 하신 말씀,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실 , 그리고 , 타볼 산에서 하신 말씀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마태 3, 17) 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했습니다그리고 아버지께서 사랑하시는 아들이 십자가에 박히신 하느님의 사랑, 비인간적인 고통 중에 있는 아들, 그리고 나는 생각했습니다. 내가 그분과 같은 똑같은 상황에 처해 있다면, 나도 사랑 받는 아들이며, 하느님 마음에 드는 아들일까? 나는 이상 항의할 입장이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나는 휴면에 잠기기 시작했습니다. , 나는 하느님의 사랑을 보았습니다, 인간적인 이유로는 고통의 뜻을 발견할 없습니다. 논리적으로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고통이 빼앗아 평화는 십자가를 바라봄으로써만 다시 찾을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아픔과 고통은 사람에게서 그의 제정신과 의지를 상실하게 만듭니다. 그러니 사람은 벌써 패배자입니다. 아픔과 고통이 사람을 점령해 버리고 맙니다. 인간 됨의 의지는 거기서 사라지고 맙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고통의 수난과 부활이 있었기에 고통받는 나도 사람으로 만들어 주시리라는 희망을 갖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야훼의 종의 말씀이 나를 위로해 주었습니다. "고통 중에 계신 분이 슬픔을 안아 주셨습니다. 아니오! 나는 이상 혼자가 아닙니다. 나는 나에게 엄청난 믿음의 선물을 베풀어 교회에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믿음 만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여러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묵상 중에 오른 시편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고통을 겪기 전에는 제가 그르쳤으나 이제는 당신 말씀을 따릅니다." (시편 119, 67)

 

나는 침대에 누워 침묵 중에 많이 울었습니다. 아픔과 고통이 나를 짓눌렀을 비로소 마지막 날들 나를 찾아 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절망적으로 보였지만 나는 빨리 말했습니다. " 모든 것이 복음을 위한 것이라면." 복음을 위해서 라면! 너무 힘들고, 지고 가기에 너무 무거운 짐이었습니다. 나는 병실 침대 앞쪽에 성모님 이콘을 걸어 두었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그분을 바라 보면서 동정녀께 의탁하며 나의 마지막 순간을 맞이하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괴로운 몸부림없이, 저항이나 싸움없이, 그러나 그분께서 나를 아드님께 바쳐 주셨던 것과 같이, 자신을 온전히 주님께  의탁하면서 죽고 싶습니다. 병은 지금 완전히 악화 있습니다. 간과 천골에 새로운 종양이 발견됐습니다. 항암치료에 의해 약간의 정지가 보이긴 했지만, 이것은 전이가 계속 발전되고 있다는 뜻이며, 어쨌든 의사들에 의하면, 나는 몇달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하느님께서 상황에서도 삶의 질을 복음화할 있도록 나를 충분히 받아 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나는 이상 고기를 잡으러 나가지 않으려고, 티베리아 호숫가 뭍으로 끌어 올린 몸으로 만든, 배를 상상해 봅니다. 그리고 아직 그리스도께서 안으로 올라 오셔서 여기서 군중을 향해 복음말씀을 들려 주실 것이라는 희망을, 동안 별로 쓰이지 못했던 삶을 돌이켜 보며, 내가 아직도 쓰일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지금 나의 선교 소명이며 희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배를 강론대로 삼아 쓰실 있도록 배를 뭍으로 끌어 올리는 일입니다.

 

나는 마지막 시간들을 등잔에 기름을 채우고 신랑을 맞이하여 혼인 잔치에 들어 가게 하시려고, 나에게 선물로 주신, 주님을 기다리는 특별한 대림시기로 삼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기름을 소유하는 것은 선물입니다. 선물은 고통 중에 힘겨운 믿음의 싸움을 위해 나에게 힘을 더해 줍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나를 창조하시고, 내가 성령 안에 있으며, 천상왕국을 약속해 주신 분의 이야기를 비추어 줍니다. 참으로 아무도 죽음의 날과 시간은 알지 못합니다. 이것은 희망으로 산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희망을 주시는 성령에 의해 우리는 그분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것입니다.

 

나는 내가 시간을 낭비한 것이 후회스럽습니다. 많은 일을 있었는데, 많이 기도할 있었는데, 많은 시간 주님과 가까이 지낼 있었는데, 그런데 지금 나는 병들어 그런 것들을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나를 슬프게 합니다. 나는 그저 오직 고통을 받아야 하는 걸까? 나를 깨끗하게 하고, 회개하고, 침묵 중에 복음을 가르치라는 걸까? 성녀 소화 데레사의 행적을 읽는 것이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요한 바오로 2세의 '구원에 이르는 고통' 다시 읽었습니다지금 내게 중요한 것은, 일치와 사랑의 표징이 있는, 하느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남은 삶의 의미에 빛을 더해 주기 때문입니다. "

 

                                                             -스피릿 데일리에서 아오스팅 ,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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